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양산시민신문

[송철호의 양산 이야기 4] 산하동계곡과 한듬마을..
오피니언

[송철호의 양산 이야기 4] 산하동계곡과 한듬마을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1/07/22 18:32 수정 2021.07.22 18:39

송철호
고전문학 박사
1.
내원사계곡을 흘러 양산천에 이르는 내(川)가 용연천이다. 내의 이름이 용연천인 것은 이 지역 이름이 용연이어서 그렇다. 내원사 매표소에서 오른쪽 내원사 방향이 아닌 직진 노전암 쪽으로 쭉 흐르는 내가 상리천이고 산하동계곡이다. 산하동계곡을 따라 걸었다. 수량은 내원사 계곡 이상이다. 계곡 따라 난 임도를 걷다 보면 왼쪽으로 희미하게 비탈을 오르는 길이 있다. 금봉암(金鳳庵) 가는 길이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경사진 비탈길을 제법 오르면 숲속 오솔길이 나오고 제법 더 걸으면 금봉암이 보인다. 금봉암은 소박함이 지나쳐 암자 같지 않게 보이는 암자다. 양산사람도 금봉암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내원사 주차장에서 멀지 않고, 산길이어도 길지 않아서 가족과 함께여도 괜찮을 곳이다.

금봉암에는 꽃이 많다. 그중 붉은 찔레꽃이 눈에 띈다. 예전에 귀동냥으로 들었던 <찔레꽃> 노래가 생각났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라는 가사가 귀에 익기도 했지만, 어릴 적에는 ‘찔레꽃은 흰데 왜 붉게 피었다고 하지’라는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금봉암에 오면 그 의문이 말끔히 풀린다. 참고로 <찔레꽃>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2년에 백난아가 발표한 노래다. 김교성과 백난아가 만주 공연을 다녀온 뒤, 만주 독립군들이 고향을 바라보는 심정을 담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사 중 3절에 ‘북간도’라는 배경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북방의 이국에서 ‘남쪽 나라 내 고향’과 ‘못 잊을 동무’를 그리워하는 애절한 사연이 소박하게 담겨 있는 데다, 푸근하고 따뜻한 백난아의 창법과 잘 어우러져 한국적 정서와 망향의 아픔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다. 찔레꽃은 꽃말이 고독이고 가족 간의 그리움이다. 장사익의 노래 중에 찔레꽃을 일컬어 ‘별처럼 슬프고 달처럼 서러운 꽃’이라는 구절이 있다. 문득 찔레꽃과 관련된 전설이 생각났다.

원 지배기 때 찔레와 달래라는 자매가 살았다. 병든 아버지를 모시며 어렵게 살아가던 중 언니인 찔레가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가게 됐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0여년이 지나 찔레는 고향으로 돌아오게 됐다. 옛집은 없어지고 집터에는 잡초만 무성, 아버지는 찔레가 공녀로 끌려간 직후에 이를 비관하여 자살했고, 동생인 달래는 정신을 잃고 밖으로 뛰쳐나가 후 소식이 끊어졌다고 했다. 깊은 슬픔에 빠진 찔레는 동생 달래를 찾으려 산과 들로 헤매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달래를 찾으려다 쓰러진 찔레를 눈이 하얗게 덮었다. 봄이 되자 그녀가 쓰러졌던 산길에 하얀 꽃이 하나 피었으니, 이것을 사람들은 찔레꽃라고 불렀다.

2.
금봉암 갔던 길을 되돌아와 다시 만난 산하동계곡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성불암 갈림길이 나온다. 성불암 갈림길에서 왼쪽 노전암 대신 오른쪽 성불암 방향으로 걸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성불암계곡을 만나게 된다. 계곡의 왼쪽은 공룡능선이고 오른쪽은 중앙능선이다. 계곡 따라 조금 걷다가 계곡을 버리고 비탈진 길을 500m쯤 걷다 보면 성불암을 만날 수 있다. 암자가 아담하면서도 정갈하다. 성불암 마루에 앉아서 바라보는 앞산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다. 비워진 생수병에 암자의 약수를 가득 채우고 다시금 길을 떠났다.

시나브로 계곡을 곁에 두고 올랐다. 길은 걷기 좋았다. 계곡의 끝 무렵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올랐다. 이윽고 만난 집북재, 집북재라고 표기된 곳도 있고, 짚북재라고 표기한 곳도 있다. 집북재는 내원사와 주남리를 잇는 산길 교통의 요지다. 원효대사가 스님들을 모을 때 정중앙인 이곳에서 북(鼓)으로 강의 시작을 알렸다고 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 빽빽한 송림 사이로 설법을 듣기 위해 산으로 오르는 학승들의 행렬이 상상됐다. 집북재서 왼쪽으로 오르면 공룡능선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면 천성산 2봉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직진하여 한듬 계곡으로 향했다.

한듬 계곡 초입은 대체로 원시림이었다. 계곡 따라 계속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조계암과 안적암으로 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가는 길옆에는 가사암도 있다. 그냥 계속 계곡 따라 노전암 쪽으로 내려간다. 계곡이 점점 좋아진다. 너럭바위들이 있어 물놀이하기에 딱 좋아 보였다. 여름이 짙어지면 김밥 한 줄에 삶은 달걀 하나, 막걸리 한 병 챙겨서 발 담그러 와야지 싶다. 한듬계곡의 끝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지금은 사라진 옛 한듬마을이 나온다.

 
한듬은 오지마을의 대명사였다. 쉬이 찾기 힘든 곳이다. 한듬은 솥발산과 천성산이 함께 만든 계곡 사이에 숨어 있는 산골 마을이다. 한듬 가는 기은 산과 산 사이의 계곡을 따라가는 오롯이 자연의 길이다. 한듬은 순우리말이다. 듬은 ‘산’이란 말이고, 한은 ‘크다’는 뜻이다. 그러니 한듬은 ‘큰 산’이란 말이다. 한듬은 세상과 차단된 곳이었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 아닌 한 장의 빛바랜 흑백사진 같은 마을이었다. 한듬은 마을 전체가 절 땅이었다. 과거 이곳 사람들은 6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매년 집마다 절에 콩 두서너 되씩을 땅세로 바쳤다고 한다.

3.
한듬계곡 끝에는 작은 다리가 하나 있고, 작은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이 바로 노전암이다. 노전암을 지나 계속 가면 장대골이 나오고, 장대골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 계곡 따라 걸으면 동침막골이 나온다. 동침막골에서 계곡 따라 직진하면 불경을 많이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대성암이다. 대성암에서 왼쪽으로 가면 정족산이고, 직진하여 고개 넘으면 그곳이 울산 최고의 폐사지 운흥사지다. 남동쪽으로 가면 조계암과 안적암이고 그 다음이 주남고개다.

노전암은 한때 20첩 밥상의 공량으로 유명했다. 건물들은 대체로 최근에 지어진 것이어서 옛맛은 없다. 노전암 자체가 조선 말기에 지어진 사찰이기도 하다. 노전암에서 지친 우리를 반긴 건 견공들이었다. 새끼 진돗개들이 사람을 알아보고 졸졸 따라왔다. 대웅전 가는 길옆 작은 밭에는 함박꽃이 가득 피어있었다. 함박꽃은 작약이다. 꽃이 크고 탐스러워서 함박꽃이라고 한다. 어릴 적 시골집 마당에 피어있던 함박꽃이 생각났다. 추억이 고향이면 언제나 아련하다.

천성산에는 모두 17개의 암자가 있다. 그중 8암자가 내원사 쪽에 있다. 이번에 들리지 못한 암자들은 다음에 찾기로 했다. 내원사 계곡을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그만큼 아름답다는 말이다. 실제로 만난 계곡들, 내원사계곡, 산하동계곡, 성불암계곡, 한듬계곡 등은 모두 여느 계곡 이상이었다. 특히, 한듬계곡은 그 계곡의 깊이와 넓은 바위와 만만찮은 수량으로 인해 절로 감탄이 나왔던 곳이다. 나는 이곳을 양산의 잘 알려지지 않은 비경이라고 말하고 싶다.

저작권자 © 양산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