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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명상생활] 명상, 운명을 거스르는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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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명상생활] 명상, 운명을 거스르는 작업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1/08/03 09:39 수정 2021.08.03 09:39

박대성 원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원불교 교무, 명상ㆍ상담전문가)

 

우리 몸은 구조적으로 한 가지 자세를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지 않다. 그러므로 몸을 한 동작으로만 고정해 놓는다면 당연히 관절에 큰 무리가 된다. 따라서 처음 앉아서 명상하는 사람은 5분만 있어도 다리가 저리고 아프고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명상 자체가 인간의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시작된 부자연스러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명상이라고 하면 고요한 산사(山寺)에서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바위 위에 앉아 삼매에 빠진 선승(禪僧)을 떠올릴 수 있다. 또는, 신선처럼 여유 있게 숲과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건 유희(遊戱)이지 마음공부나 수행은 아니다.

명상이나 참선은 자신의 팔자대로 업력대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 이 쇠사슬을 끊기 위해 도전하는 마음의 혁명이다. 선천적으로 내게 주어진 상황이나 현실에 순종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과감히 떨치기 위해 삶과 죽음을 걸고 명상과 마음공부로 마음의 혁명에 동참하는 큰 결단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물론, 심신의 건강을 위해 명상을 시작하는 것은 권장할 만한 좋은 일이다. 그러나 육신의 건강과 심리적 상태는 한 가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난 상황에 따라 반복적으로 쇠락을 겪을 수밖에 없다. 결국, 내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근본적 고통을 벗어날 수 없다.

처음 자리에 앉아 명상을 시작하면 다리뿐만 아니라 온몸이 아프고, 망념이 들끓어 온통 요란해진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이 불편한 마음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로켓이 중력을 뚫을 만큼의 추진력을 확보해야 대기권을 넘어 우주로 솟구칠 수 있는 것처럼 나의 내면에 굳건한 마음의 힘을 쌓아야 나고 죽는 자연적 변화까지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력이라고 하는 거대한 제한 속에서 한낮 범부의 삶에 머물러 자만자족하고 살면 그만일 수 있다. 그러나 일백 개의 골절(骨節)과 일천 번의 정성이 사무치는 결심을 세워야 이 업장(業障)을 뚫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공부는 붕새와 연어가 바람과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고 역설적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명상을 진지한 표정과 비장한 각오로 임해야 하는 것으로 판단한다면 명상을 절반만 이해한 것이다. 가야금의 줄은 바짝 당긴다고 또는 느슨하게 한다고 소리가 잘 나는 것이 아니라, 중도를 잘 지킬 때 절묘한 소리가 나는 것이다. 마음공부도 이와 같아서 내면의 서원은 굳세게 유지하되 밖으로는 자애와 연민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시시각각 나타나는 마음의 변화를 치열하게 싸워서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한 부분으로 깊이 수용하고 인정해야 비로소 하나로 합해지고 그 일치감마저 사라지는 것이다. 마음을 어르고 달래면서 쉼 없이 걸어가야 하는 것이 바로 명상이자 마음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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