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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데 꼴데(1) - 느그 가을야구 안 할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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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데 꼴데(1) - 느그 가을야구 안 할끼가?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1/10/06 10:27 수정 2021.10.06 10:27

서용태
인문연구공동체 로두스 대표
육군3사관학교 인문학처 강사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단연 야구다. 전 세계적으로 야구를 우리나라만큼 좋아하는 나라도 드물다. 프로스포츠로 야구가 있는 나라 역시 몇몇 나라뿐이다. 이런 한국에서 가장 야구팬이 많은 고장은 부산ㆍ경남이고, 더불어 가장 인기 있는 프로야구팀이 부산ㆍ경남을 연고로 하는 롯데자이언츠다. 그만큼 인기가 높으니 당연히 팀 성적이 좋아야 하겠지만, 롯데자이언츠는 KBO(한국야구위원회) 최다 꼴찌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인기와 성적이 정확히 반비례하는 이 기묘한 팀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시계를 거꾸로 돌려 처음으로 가보자.

프로야구가 없던 1970년대에는 고교야구 인기가 지금의 프로야구에 버금갔다. 모교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릴 수 있는 최고의 방편이 일류대 합격자 수 아니면 운동부(특히 야구부)를 운영하는 것이다 보니 경남고와 부산고를 비롯해 야구부를 보유한 고등학교들이 전국적으로 많았다. 그만큼 국민(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야구만 알던, 야구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젊은이들이 대거 배출됐다.

하지만 그들이 갈 수 있는 곳, 계속해서 야구를 할 수 있는 곳은 한정돼 있었다. 1980년대 초 기준으로 16개 대학야구팀과 10개 실업야구팀이 바로 그곳이다. 그런데 대학팀은 4년 후 졸업해야만 하고, 실업팀은 보통 서른 살 이전에 야구선수를 그만두고 일반부서에 배치돼 일했다. 즉,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들이 야구선수로서 꿈을 이어나갈 수 있는 여건이 전혀 갖춰져 있질 못했다.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은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고 ‘3S(Sports, Sex, Screen) 정책’을 앞세운 각종 유화 정책을 내놓으면서부터다. 당시 청와대는 국민스포츠로 자리 잡은 야구를 적극 활용하기 위해 프로야구를 출범시키기로 결정했다. 프로야구가 출범하던 1982년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반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야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최고 권력의 뜻’에 따라 반강제적으로 프로야구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 프로스포츠의 생명은 ‘흥행’에 있다. 비록 한강의 기적으로 국민소득 1천달러 시대를 열었다고는 하지만 날마다 야구장을 찾아 입장료를 내고 들어와 물건을 팔아주며 서너 시간을 소비해줄 만큼 여유로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때 프로야구 흥행을 위해 던진 핵심 승부수가 바로 ‘지역연고제’였다. 지역연고제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심상치 않은 호남 사람들이 뭉치게 되는 매개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지만, 역으로 호남을 비롯한 모든 지역 사람들의 관심을 야구장으로 끌어내 정치적 불만과 관심을 무마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더 큰 힘을 받았다. 이는 정치학자들이 얘기하는 3S 정책의 핵심이기도 하고, 1970년대 들어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었던 선거 이래로 강화된 영ㆍ호남지역 간 라이벌 의식이 발동되면 이제 막 출범하는 프로야구의 성공을 보장할 최고의 흥행카드로 손색이 없었다.

1982년 3월 27일 개막전이 열리면서 한국프로야구가 공식 출범했다. 지금은 10개 프로팀이 있지만, 출범 당시에는 6개 팀이었다. 그 6개의 팀을 만드는 작업도 결코 쉽지가 않았다. 우선은 이윤 추구가 목적인 기업 입장에서 별다른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고 막대한 운영비만 들어갈 프로구단을 창단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기업이 없었다. 무엇보다 흥행을 위해 너도나도 서울을 연고로 삼겠다고 하는 바람에 연고지 조정에 애를 먹었다. 모두가 눈독을 들이던 서울 연고팀은 프로야구 기획 단계에서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한 ‘MBC청룡’이 차지했다. 출범 초기 흥행을 위해선 방송사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재벌기업에선 유일하게 삼성이 나서서 대구ㆍ경북을 연고로 하는 ‘삼성라이온즈’를 창단했다. 삼성은 “우리가 중소기업들하고 경쟁하는 건 격이 맞지 않는다”며 현대나 럭키금성 같은 다른 재벌들도 나서주길 바랐으나, 그들은 한사코 나서기를 거부했다. 이후 ‘OB베어스’가 충청을 연고로, ‘해태타이거즈’가 호남을, ‘삼미슈퍼스타즈’가 경기ㆍ강원을 연고로 각각 창단했다.

제일 마지막으로 창단한 팀이 ‘롯데자이언츠’였다. 롯데는 끝까지 서울을 연고로 하려 했지만 청와대 입김으로 인해 마지못해 부산ㆍ경남을 연고로 하게 됐다. 애초 부산ㆍ경남지역 연고 구단으로 럭키금성그룹이 유력했으나 럭키금성이 야구단 창단을 거부하는 바람에 롯데가 연고 구단이 됐다. 하지만 럭키금성은 이후 MBC청룡을 인수해 KBO에 참가하게 되며 이것이 지금의 ‘LG트윈스’이다. 현대도 뒤늦게 프로야구에 뛰어들었다. 최약체이던 삼미슈퍼스타즈는 ‘청보핀토스’와 ‘태평양돌핀스’를 거쳐 1995년 ‘현대유니콘스’로 이어졌지만, 이마저도 지금은 ‘우리-넥센-키움히어로즈’로 넘어가며 파란만장한 팀의 역사를 갖게 됐다.

<다음 칼럼에 2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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