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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슬기로운 명상생활] 착심이 없어지는 것..
오피니언

[슬기로운 명상생활] 착심이 없어지는 것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1/11/02 10:26 수정 2021.11.02 10:29

박대성 원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원불교 교무, 명상ㆍ상담전문가)


어린 시절에 애지중지하며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성인이 된 뒤에 다시 가져다준다면 누구도 그때와 같은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禪) 명상을 통해 마음의 크기가 확충된다면 예전에 자신이 소유하려고 고집하고 집착했던 것들이 이제는 우습게 보일 것이다. 그때 ‘나’라고 생각했던 그 경계가 더 이상 ‘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의 본질은 모두가 텅 비어서(空) 항상 한 자리에 고정되는 것이 없다. 이런 이치를 터득한다면 ‘나’를 비롯한 그 무엇에도 집착할 이유가 전혀 없다. 명상을 계속해서 닦다 보면 집착의 대상을 ‘나’와 ‘나의 것’으로 인식하는 동일시(同一視)에서 빠지게 된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고착 대상과 거리를 두는 ‘탈동일시’가 필요하다. 심리치료에서도 프로이트를 대표로 하는 정신분석의 전통에서는 탈동일시, 인지행동치료(CTB)에서는 탈중심화, 수용전념치료(ACT)에서는 탈융합이라는 용어로 각각 사용한다.

동일시는 개인이 성장하면서 접하는 다양한 인물과 신념을 자신과 일치시킬 때 생겨난다. 이러한 판단에서 생성한 이미지들은 긍정적으로 작용할 때도 있지만, 대개 부정적으로 작동하면서 자아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우리는 대개 이러한 동일시 현상을 통해 자신이 주착하는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물론, 자신보다 뛰어난 인물이나 사상을 자신과 동일하게 생각하게 된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이것이 철석같이 굳은 습관이 되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장벽으로 자리 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 느낌 등을 ‘참 나’로 집착하게 된다. 이것을 바탕으로 ‘나는 ~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만든다. 이러한 강력한 아상(我相, Ego)에 갇혀있는 삶은 무한한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러한 고통에 시달리는 우리를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파란고해(波瀾苦海)의 일체 생령’이라고 표현했다.

명상은 동일시 때문에 명료하게 인식되지 않고 사방으로 튀었던 생각들이 왜곡된 필터가 돼 현상에 대한 지각을 왜곡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따라서 에고의 고집과 습관에 의해 자동으로 떠오르는 사고는 실재에 대한 정확한 반영이 아니라 단지 영상에 비친 그림자일 뿐임을 관조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관조를 통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비추다 보면 내가 평소에 어떤 대상에 집착하고 동일시하는지 발견할 수 있다. 그 대상을 억지로 애를 쓰며 지우거나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변화가 이뤄진다. 명상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면밀하게 비춰보면 동일시라는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에 자신을 동일시하며 살고 있다. 그 속에 안주하고 있어야 자아를 영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오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상으로 자신과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진리 위에 당당히 독존(獨存)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이 세상에서 완수해야 할 영적 진화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착심(着心): 어떤 일에 마음을 붙임. 또는 그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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