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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18] 무지개 색깔 ..
오피니언

[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18] 무지개 색깔 글짓기에 성공한 쎈 언니들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1/11/19 13:24 수정 2021.11.19 13:24
양산에는 깔롱진 언니들이 산다/ 북살롱 글동무

이기철
시인
‘뒷방 늙은이’, ‘경단녀’ 등 단어는 그들 처지를 위로하는 척하며 외면하는 말이다. 성별을 가리지 않고 은근히 다정을 가장한 싸늘한 시선이다. 세상에는 누구 하나 모자라는 사람이 없다. 다만, 그들이 살아가는 데 기회나 계기가 도달하지 못했거나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기다려 주지 않고 떠나가는 사회, 외면하는 일상,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장은 단독 범행이 아니라 공모다. 자신들은 저만치 앞서가 있으면서 뒤처지거나 어쩔 줄 모르고 방황하는 이들에게는 손잡아 줄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채근만 한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살벌한 세상’이란 매일 발생하는 범죄만이 아니다. 우리가 소홀히 한 일, 내버려 둔 일까지 포함된다. 함께하지는 말 대신 ‘나부터’가 문제 핵심이다. 보고 있자니 착잡하다.

‘깔롱지다’는 말이 있다. 경상도 사투리다. 옷매무새 등을 신경 쓰며 멋을 부린다는 뜻인데 소심한 반격으로 읽힌다. ‘나도 할 줄 알거든’. 그런 이들이 모여 만든 책이 태어났다. 날개 돋친 듯 팔릴 일도 없고, 베스트셀러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지만 글을 쓴 주인공들은 따박따박 한 자 한 자, 자신들이 문장을 수놓아 글을 만들었다.

‘양산에는 깔롱진 언니들이 산다’.

양산시가 주최하고 양산YWCA가 주관한 더미 북(The me book), ‘마음의 품격’ 프로젝트. 특히 양산YWCA는 그간 여성들 사회적 지위와 역할 변화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일해왔다. ‘생명의 바람 세상을 살리는 여성’이라는 슬로건을 내 걸고 여성 인권이 존중받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그 방편으로 시작한 사업 중 하나가 글자를 넘어서 나를 찾아가는 글짓기 프로그램. 수강생들은 TBN 경남교통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빛나는 저녁 김혜란입니다’를 진행하고 있는 김혜란 씨. 그녀가 안내자가 돼 북살롱 글동무 열 명을 글이라는 신세계로 인도했다.

2021년 10월 현재 35만3천738명이 사는 도시 양산. 물금(勿禁)을 품고 신도시로 더욱 전진하는 곳이다. 도시는 빌딩 숲으로 인해 생기는 그늘만 있는 게 아니다. 사람 사는 곳엔 어디든 명암(明暗)이 존재한다. 불평등, 차별, 편견이 질병처럼 스며드는 사회에는 이를 깨트릴 베풂, 나눔, 배려가 필요하다. 개인 혹은 사회가 나누어 감당할 몫이지만 용기와 자기 헌신이 필요하다.

이른바 ‘삶의 돌파구’. 돌파는 맨몸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도구가 필요하다. 이들이 선택한 도구는 글. 삶은 무엇인가를 성취해나가는 과정이다. 흔히, 도전이라고 말한다. 자신 처지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살아가는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한다. 고민만 하고 있으면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도전 과목 중 제일 어려운 것을 꼽으라 하면 글을 쓰는 행위다. 기술로는 되지 않는다. 매번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는 글짓기는 도면이 따로 있는 집짓기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일은 자신을 세우고 발언하게 만든다. 가슴 속에 묻어둔 보물을 끄집어내 모두를 놀라게 하는 멋진 일이다. 더미 북 글동무들은 이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이 책은 6마디로 구성돼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첫 마디를 시작으로 양산이라는 도시에 질문하고 답하는 타향과 고향이 지닌 의미, 자신감을 한껏 드러낸 ‘내가 낸데’, 일상 탈출이라 쓰고 여행이라 말하는 마디, 결혼, 이혼, 자녀 등 생활 파편들을 던져놓고 드디어 깔롱진 언니들 당당한 현재가 그려진다.

참여한 모든 이들 글이 진주처럼 찬란하지만, 작은 것에도 눈길을 거두지 않는 ‘양산천의 큰물칭개나물’(주선희)이라는 글은 예사롭지 않다. 후배와 양산천 둔치를 걸으면서 만난 애기노랑토끼풀, 주름잎, 개양귀비, 분홍애기낮달맞이, 석잠풀, 모래톱 등을 관찰하는 글은 따뜻하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글쓴이 마음이 고스란히 보이건만 한 발 더 나간다.

걸음을 더 옮기다 빗물펌프장 작은 다리 난간에서 발견한 큰물칭개나물. 아뿔싸. 뿌리를 내릴 흙도 부족하고 뙤약볕에 곧 말라죽을 처지에 놓인, 하지만 연보랏빛 꽃을 활짝 피운.

후배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내내 생각해도 걱정이다. 며칠 후 다시 들러 자세히 살펴보니 난간에 설치된 파이프 벌어진 공간에 뿌리를 내린 큰물칭개나물. 안심은 했지만, 만감이 교차한다.

제자리를 찾지 못한 꽃에서 글쓴이 의식은 전진한다. 잡초라고 무시해도 될 일이건만 말이다. 식물 하나가 처한 상황에서 사회를 되돌아본다. 약자에 관한 관심으로 확대된다. 글이 가진 힘을 제대로 발견한 셈이다.

한 사람을 소개한다. 세계 최고령 나이에 시인으로 데뷔한 시바타 도요 씨. 92세 때까지는 그냥 할머니였다. 취미 활동으로 무용을 했는데 나이가 들어 힘들어졌다. 이를 본 아들이 글짓기를 권했다. 할머니가 선택한 장르는 시. 그녀가 쓴 첫 번째 시집, ‘약해지지 마’는 일본에서만 150만부 이상 팔렸다. 세상을 떠난 지 오래지만 남긴 한 마디는 아직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인생이란 늘 지금부터야. 그리고 아침은 반드시 찾아와. 그러니 약해지지 마’.

필자도 글로 먹고사는 사람이지만, 양산 깔롱진 언니들을 못 따라가겠다. 조만간 슬쩍 데이트 신청이라도 넣어야겠다. 나에게도 또 다른 글동무들이 생겼다. 무려 열 명이나.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적어둔다. 수고하셨고 고마웠다는 말도 함께.

김효선, 이정숙, 정자훈, 조선옥, 주선희, 하복선, 이방숙, 최홍자, 문민정, 박동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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