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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송철호의 양산 이야기 7] 양산의 옛 이름 삽량주의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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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철호의 양산 이야기 7] 양산의 옛 이름 삽량주의 지명 유래와 삽혈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1/11/26 11:49 수정 2021.11.26 11:54

송철호
고전문학 박사
양산의 옛 이름은 ‘삽량주’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양주(良州)는 문무왕 5년, 인덕 2년(665)에 상주(上州)ㆍ하주(下州: 중심은 현재의 경상남도 창녕)의 땅을 분할하여 삽량주(歃良州)를 설치한 것이었다. (중략) 경덕왕이 이름을 양주(良州)로 고쳤다. 지금(고려)의 양주(梁州)이다”라는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 양산조에 “고려 태조 23년(940) 경자에 양주(梁州)로 고치고, (중략) 본조 태종 13년(1413) 계사에 예에 의하여 양산군(梁山郡)으로 고쳤다. 별호는 의춘(宜春)이며, 또 순정(順正)이라고도 한다”고 해 ‘삽량주→양주(良州, 梁州)→양산’으로 지명이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삽량주는 삼국통일 직후에 완성된 구주(九州)의 하나다. 757년 개편 당시 삽량주는 하나의 소경과 12개 군, 34개 현을 관장했으며, 주에 직속하는 현은 하나였다. 주치(州治)는 현재의 양산이다. 이 주에는 군부대로서 삼량화정(參良火停)과 만보당(萬步幢)을 뒀으며, 장관으로 도독(都督), 차관으로 주조(州助), 그 밑에 장사(長史, 일명 司馬)를 각각 1명씩 뒀다. 수도 서라벌과 금관경이 여기에 있어 신라시대 경기도쯤 되는 위상으로 보이지만, 당시 경주 일대를 양주와 독립된 경기로 구획했던 것으로 봐 공식적으로는 수도권이 아니었다.

지명에 ‘삽’이라는 이름은 매우 드물다. 그렇다면 삽량주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부산대 이병운 교수는 삽량주 ‘삽(歃)’은 ‘sVpV’형에서 변화한 것으로, 이는 ‘중심, 으뜸, 큰’을 뜻하며, ‘량(良)’은 ‘벌, 땅, 고을’을 의미하기에 ‘삽량 주’를 ‘큰 고을, 중심인 고을’로 추정됨을 밝혔다. 그 뒤 ‘良州’의 ‘良’은 동일한 의미의 ‘梁’으로 바뀌어 현재의 ‘양산(梁山)’에 이르게 됐다고 했다. 그런데 삽량주 유래에 관해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삽혈의식(歃血儀式)’과 관련해서다.

삽혈은 ‘맹세할 때 희생(犧牲)의 피를 들이마시는 일, 또는 그 피를 입가에 바르는 일’을 뜻하는 말이다. 희생을 잡아 서로 그 피를 들이마셔 입술을 벌겋게 하고, 서약을 꼭 지킨다는 단심(丹心)을 신에게 맹세하는 일을 삽혈동맹이라고 하며, 이러한 의식을 삽혈의식이라고 한다. 삽혈의식은 고대 중국 사회를 비롯한 고대 동아시아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맹세 의식이다. 주로 국가 간 통치자들 사이에서 상호 맹세 과정에서 행해졌다고 연구되고 있으며, 그 과정은 어떤 산 위에 제단을 쌓고 엄선된 흰 백마 등의 신성시 되는 제물을 잡아 그 피를 서로 마시거나 입술에 피를 붉게 칠하고 서로 맹약을 다짐한 뒤 그 다짐을 적은 문서를 단 근처 땅에 묻는 과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삽혈의 예는 중국 고대 춘추시대에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춘추시대는 회맹정치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제후들이 모여서 회맹할 때 하는 결맹법이 삽혈이었다. 삽혈은 제물인 소의 왼쪽 귀를 절단해 그 피를 제후들이 마시는 것인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고 소나 양 혹은 마 등을 희생물로 삼아 구덩이 위에서 죽여 왼쪽 귀를 잘라 반(盤)에 담고, 그 피를 취해 제기에 담는다. 맹약을 신께 낭독해 고하고, 맹약에 참석한 한 명, 한 명이 모두 희생의 피를 마신다. 삽혈을 마친 후 맹약의 정본은 희생의 위에 놓고 구덩이에 매장하며 부본은 결맹한 이들이 각각 가지고 돌아갔다. 맹자 고자 하에도 삽혈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오패 가운데서는 제나라의 환공이 가장 힘이 세었다. 규구에서 모임을 가졌을 때에는 제후들이 희생으로 삼은 소나 양을 묶어 놓고 그 위에 맹약의 글만을 올려 놓았을 뿐, 희생을 죽여서 그 피를 입에 바르는 의식은 행하지 않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삽혈’ 의식이 기록돼 있다. 665년(신라 문무왕)에 일어난 일이다. 문무왕과 당나라 칙사 유인원ㆍ유인궤, 웅진도독 부여륭 등 3인이 웅진 취리산에서 맹약을 맺은 것이다. 먼저 흰 말을 잡아 맹세하고 하늘과 땅의 신, 그리고 개울과 골짜기의 신에게 제사 지낸 뒤 그 피를 마셨다. 다음은 유인궤가 작성한 맹서문이다. “백제에게 그 옛 땅을 보전하게 하니 신라에 의지하고 길이 우방으로 삼을 것이다. 각기 지난날의 묵은 감정을 풀어버리고 화친을 맺고…. 희생을 잡아 피를 마시고 내내 친목하여 재앙을 서로 나누고 서로 도와 은의를 형제처럼 해야 할 것이다. 맹세를 어겨 군사를 일으키면 귀신의 재앙을 받으리라. 제사가 끊겨 후손이 없도록 할 것이다” 희생의 피를 마신 3자(당ㆍ신라ㆍ백제)는 희생과 예물을 제단의 북쪽 땅에 묻고 맹서문을 신라 종묘에 간직했다. 유인궤는 다시 신라와 백제, 탐라, 왜의 사신을 거느리고 바다 건너 태산의 제사에 참석했다.

조선시대에는 공신회맹이 유행했다. 조선시대 ‘공신회맹’은 달랐다. 그야말로 공신들이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충성서약의 장’이었다. ‘공신회맹’은 아주 엄숙한 분위기에서 치렀다. 왕과 왕세자가 직접 참석했다. 회맹에 참석하는 이들은 7일 전부터 재계했다. 제사와 삽혈을 위해 피를 제공할 희생물은 소, 양, 닭, 돼지 등이 애용됐다. 왕과 공신들은 제단 앞에서 4번의 절을 올렸고, 천지신명의 신주 앞에 향불을 태웠다. 그런 뒤 ‘회맹’의 하이라이트인 삽혈동맹을 펼쳤다. 피를 입에 바르는 의식이었다. 뒤를 이어 맹서문을 읽었다. 이들은 자연스레 ‘혈맹’이 됐다. 의식에는 공신들은 물론 때에 따라서는 공신의 자식들까지 동원됐다. 이들은 대대손손 임금을 배신한다면 천지신명의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것을 맹서했다.

공신회맹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은 신생 조선을 건국하고 기틀을 마련한 태종이다. 태종은 모두 다섯 차례나 공신회맹을 했다. 개국공신(1392)은 물론 1ㆍ2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운 정사공신(1398)과 좌명공신(1401)들이 5차례나 모여 충성을 다짐했다. “임금이 마암의 단 아래에 가서 좌명공신과 더불어 삽혈동맹하였는데, 제복을 입었다” 『태종실록』 권 제1, 14장 뒤쪽, 태종 원년 2월 12일(신축)의 기록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삽혈에 관한 조선시대 기록은 여럿 있으나 하나만 더 살펴보자.

“임금이 소무ㆍ영사 양 공신 및 구공신의 여러 적장자들과 함께 북악 아래에서 회맹제를 거행하였다. 단을 세우고 남면하여 완석을 깔았으며 소 한 마리ㆍ양 한 마리ㆍ돼지 한 마리를 희생으로 바쳤다. 임금이 원유관과 강사포 차림으로 여를 타고 악차에 이르자, 면복을 갖춘 왕세자와 복장을 갖춘 배제관 및 집사관들이 모두 들어와 제자리로 나아간 뒤 의식 절차에 맞춰 예를 거행하였다. 찬례가 삽혈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이에 삽혈하였고, 왕세자 이하 각 위치에 서 있는 자들도 모두 삽혈하였다”(『인조실록』 권 제19, 22장 앞쪽, 인조 6년 9월 13일(경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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