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용복 경성대학교 국제무역통상학과 교수 |
이 판국에 누가 빚을 지는 것이 합당할까? 정부가 지는 편이 훨씬 좋다. 첫째, 개인의 과도한 빚은 상환하기 어렵다. 반면, 정부의 빚은 상환할 필요가 없다. 둘째, 개인의 빚은 국민(개인)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정부의 빚은 아무도 힘들게 하지 않는다. 정부의 빚은 관리할 뿐이지, 갚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셋째, 개인의 빚은 경제 전체에도 해롭다. 개인이 빚을 갚느라 소비를 줄이면 내수가 위축되고, 기업 매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경우, 개인의 빚은 금융과 경제 전체를 위태롭게 만들기도 한다. 개인의 빚이 너무 많아 파산하면, 그 돈을 빌려준 은행 등 금융기관이 위험에 빠져, 금융위기가 일어날 수 있다. 금융위기는 대개 경제위기로 전화된다.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정확히 이에 해당한다. 반면, 정부가 빚을 진다고 경제에 해로울 이유가 없다. 오히려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넷째, 보다 근본적으로, 빚을 포함해 국민의 짐을 덜어주는 일은 정부(국가)의 당연한 의무이다. 빚에 쪼들리는 국민을 외면하는 정부가 왜 필요한가.
하지만, 우리 정부는, 국민은 죽어나든 말든, 오로지 빚을 지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 코로나19가 창궐한 이후 우리나라 GDP 대비 정부채무 비율이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 가장 적게 증가했다. 구체적으로, 우리나라 정부채무 비율은 2019년 말 39.2%에서 2021년 6월 말 47.1%로 겨우 7.9%p 증가하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미국은 22.9%p, 일본은 17.6%p, 유로존 평균은 19.7%p, 선진국 전체 평균은 20.2%p 증가했다. 이렇게 우리 정부가 옹색한 재정을 집행하는 동안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GDP 대비 95.2%에서 104.2%로 세계에서 가장 큰 9%p 증가했다.(미국은 4.5%p, 일본은 6.4%p, 유로존 전체는 3.7%p, 선진국 평균은 4.7%p)
우리나라에서는 국민만 죽어난다는 증거는 또 있다. 우리나라 가계부채 104.2%는 전 세계적으로 역사상 가장 높은 비율이다. 2021년 6월 말 기준, 이 비율은 미국 79.2%, 일본 63.9%, 유로존 전체 평균 61.5%, 선진국 전체 평균 77.2%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절대량뿐만 아니라 증가 속도에서도 세계 1등이다.
더 큰 문제는 이 가계부채 통계가 실제 부담을 축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가계부채가 GDP 대비 104.2%라 할 때,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개인 채무가 누락돼 있다. 하나는 전세보증금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사업자 대출이다. 전세보증금은 개인이 개인에게 집을 담보로 빌린 돈, 분명히 빚이다. 하지만, 공식 통계에는 포함하지 않는다. 개인사업자 대출 또한 겉으로는 ‘(중소)기업 대출’이지만, 개인이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개인 대출이다. 이 또한 빠져있다. 이에 관한 공식 통계는 발표되지 않고 있지만, 금융권에서는 대략 1천200조원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것까지 포함하면, 가계부채 비율은 104.2%가 아니라 160% 이상이다!
가계부채는 망국적이다. 개인이 빚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상환을 포기하면 경제에 큰 재난이 일어난다. 우선, 부채가 많으면 이자와 원금을 갚느라 다른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 금리 상승이 뚜렷해진 현재 이 문제는 피할 수 없어 보인다. 가계가 소비를 줄이면, 물건을 만들어 파는 기업과 자영업이 타격을 받고, 거기에 고용된 사람들도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 이렇게 실업자가 증가하면, 내수가 더 위축되는 등 악순환이 강화한다. 더 극단적인 경우, 빚을 갚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면 유동성 경색 혹은 금융위기로 비화할 수도 있다. 은행이 돈을 떼이면, 기업의 운영 자금 등 꼭 필요한 곳에도 대출을 꺼린다. 이것이 유동성 경색이고, 경기침체를 낳는다. 2008년 미국에서 벌어진 금융위기가 정확히 이것이었다. 부풀 대로 부푼 우리나라 부동산 버블이 꺼지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보장이 없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한데도 우리 정부는 너무나 무책임해 보인다. 작년에 정부 예산을 짜면서 예측했던 세금보다 50.5조원이나 더 걷혔다. 올 7월 말까지 31조5천억원이 예상보다 더 걷힌 데 이어, 그 이후에도 19조원이나 더 걷힌 것이다. 세수 예측이야 경제 상황이 변하면 달라지니, 틀릴 수 있다. 하지만, 늘어난 세금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의지의 문제다. 우리 정부는 7월까지 더 걷힌 세금 중 2조원을 정부채무 ‘조기’ 상환에 사용했다. 굳이 지금 당장 갚지 않아도 될 정부 빚을 미리 갚았다는 말이다. 올 하반기에 더 걷히는 19조원 중에서도 2조5천억원은 정부채무 ‘조기’ 상환에 쓰고, 3조6천억원은 내년 예산으로 넘기기로 했다. 정부 재정법에 따라 이렇게 이월된 3조6천억원 중 30%(약 1.1조) 이상은 정부채무 상환에 사용해야 한다. 국민은 빚더미에 깔려 신음하고, 그로 인해 경제는 풍전등화에 처했는데, 정부는 별 관심이 없다. 더 가관은, 이번 추경에서 소상공인 지원 명목으로 책정한 2조1천원은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빌려주겠다’고 한다. 저리(낮은 금리)라고 생색내지만, 머지않아 갚아야 할 돈이다.
정부가 가계부채 증가를 막을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다. 우선, 우리나라 가계부채 급등 원인부터 보자. 첫 번째 이유는 집값 폭등이다. 지나온 과정을 복기하면, 토건족과 투기꾼, 그리고 그들에 기생하는 언론이 집값 상승을 부추겼다. 실제로 집값이 상승하자, 영원히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할 것 같은 불안감에 무주택자들이 무리하게 빚을 내서 비싸게 집을 샀다. 비슷한 절망에 빠진 2030세대도 가상화폐나 주식 사듯 집을 샀다. 물론 빚을 끌어다 그렇게 했다. 대출을 규제하려 할 때면, 수구 언론은 무주택 서민만 피해 본다며, 격렬히 저항했다. 이 난장판에서 핵심은 집을 돈 주고 사는 방법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점이다. 토건족과 투기꾼들이 집을 갖고 장난을 치더라도, 안정된 주거가 보장된다면 무리하게 빚내서 그 장단에 맞출 이유가 없다. 필자의 9월 24일자 칼럼 ‘대장동 논란, 우리는 무엇에 분노해야 하나?’에서 지적한 것처럼, 정부가 그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겉으로는’ 정부가 빚을 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그것을 한사코 거부한다.
우리나라 가계의 빚이 늘어난 두 번째 이유는 먹고 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코로나19 방역의 부담을 모두 국민에게 떠넘겼다. ‘사회적 거리두기’란 말이야 우아하지만, 실제는 다수의 경제활동 제한이었다. 우리나라 자영업자만 약 550만명이고, 그 가족까지 더하면 국민의 30%가 자영업으로 먹고산다. 이들의 영업이 망가지면서 실업자도 늘었다. 집합 금지로 거의 모든 대면 활동도 중단됐고, 관련 일에 종사하시던 분들도 당장 일거리가 끊겼다. K-방역의 실체는 이렇게 사회적 약자의 희생이었다. 정부는 많은 국민의 생계를 위협하면서도 일말의 ‘미안함’도 표하지 않았다. 중소소상공인과 자영업자 ‘보상’(지원이 아니라,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보상이다!)에 편성한 예산을 보면 안다. 국민이 생계를 위해 빚을 지는 대신 정부가 빚을 지고 충분히 보상했더라면,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이렇게 많이 늘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평소에도 우리나라에는 실업자 천지다. 정부가 빚을 지더라도, ‘일자리 보장제’ 등을 시행하면 가계부채를 줄일 수 있다.
정부가 지출하는 돈은 어디 우주로 증발하지 않는다. 그 돈은 국민 사이에서 돌며, 모두의 물질적 생활 조건을 개선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국민 개인이 진 빚은 경제에 매우 부정적인 충격을 끼치지만, 정부의 빚은 그렇지 않다. 설사 정부채무 수준을 관리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빚을 지지 못할 이유가 없다. 경제가 잘 돌아가면 정부 세수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반대로, 국민이 죽어나면 경제도 죽고, 정부채무도 늘어난다. 부디 이제라도 정부가 마음을 고쳐먹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