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양산시민신문

[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20] 그대는 밤이 ..
오피니언

[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20] 그대는 밤이 지새도록 왜 잠 못 드는가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1/12/16 14:27
빛 혹은 그림자/ 로런스 블록
빈방의 빛/ 마크 스트랜드

이기철
시인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지난해 8월 17일. 정확하게 기억하는 까닭은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지리한 병마(病魔)에 시달린 후 퇴원한 지 한 달째 되는 날이어서 그렇다. 몸을 조금씩 움직여 근력을 키울 목적으로 동네 근처 카페 순례를 하고 있을 때였다. 몹시 단정하고 깔끔한 카페 L. 거기 그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반가움에 한참 그를 쳐다보며 묵혀둔 이야기를 꺼냈다. 중얼거리며 혼잣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나에게 한 줄기 빛이야’

에드워드 호퍼는 평소 평면적 묘사법으로 인간이 지닌 고독한 이미지를 진솔하게 담는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에서 다시 만난 그림은 ‘밤을 새우는 사람들’. 이 작품은 자신이 살고 있던 맨해튼 근처 그리니치빌리지, 어느 간이식당에서 영감을 얻어 그렸다. 한참 들여다보면 단조롭지만, 깊은 상실감과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묻어 있다.

화가 에드워드 호퍼와 그가 남긴 작품을 매우 사랑한다. 고독과 절망을 이토록 기가 막히게 밝혀내는 이는 드물다. 빛과 그림자만으로도 훌륭하게 그 심정을 재현해낸다.

어렵지 않고 부담스럽지 않아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다. 평범이 주는 힘이 잘 녹아있어서다. 사실주의 화가라는 명성에 걸맞은 인물이다. 호퍼 작품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 마틴 스콜세지도 그를 잊지 못한다.

두 권의 책 표지

두 권 책을 번갈아 가며 읽었다. 먼저 릴레이식으로 꾸민 단편 소설집, 소설가 로런스 블록이 엮은 ‘빛 혹은 그림자’.

평소 그를 존경했거나 사랑했던 작가들이 참여해 작품 한 점씩을 맡아 그림 대신 글로, 천이 아닌 종이라는 캔버스에 이야기를 채웠다. 이들이 기꺼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유는 분명하다. 호퍼가 남긴 그림들은 ‘본다’는 의미보다 ‘읽어주길 기다린다’고 하는 편이 적절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퓰리처상 수상자인 소설가 로버트 올렌 버틀러를 비롯, 스티븐 킹 등 17명 작가가 참여했다. 각기 다른 문체는 호퍼 작품이 남긴 결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어 감동을 더 키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중 한 편인 추리 소설가 마이클 코널 리가 쓴 단편, ‘밤을 새우는 사람들’. 실종된 딸을 찾아달라는 아버지와 의뢰를 받은 형사, 마침내 맞닥뜨린 진실, 실종자는 사라진 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감추고 살고 있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장소는 시카고 미술관 에드워드 호퍼 상설 전시실. 형사와 그녀는 무슨 약속을 했을까? 전시장에 놓인 벤치에 앉아 그들이 나눈 진심은 어떻게 막을 내렸을까? 실종됐다던 딸은 호퍼 그림 앞에 앉아 형사에게 말을 던진다. ‘그림이란 항상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아니겠어요?’ 그림 이미지만 알고 있어도 풍성해지는 내용이다.

밤을 새우는 사람들

두 번째 책은 계관시인 마크 스트랜드가 말하는 호퍼. ‘빈방의 빛’.

‘머묾’이 주는 공간과 그 속에 자리한 사람들 이야기다. 시인답게 간결하게 서정미가 비감하게 흐르는 문체다. 사실주의 화가에게 형식미가 돋보인다고 주저 없이 말하는 이다. 아마 그림에서 나타나는 상실감, 덧없는 부재(不在)가 그리 정의하도록 부추겼을 게 분명하다. 그림 한 점을 끌고 가는 서사(敍事)는 있는 그대로를 확장 시켜 글을 이어간다. 우리가 그림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 메시지다. 인상적인 것은 호퍼 그림을 사회적인 해석은 접어두고 오로지 미적으로만 접근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는 점.

에드워드 호퍼 그림은 다행히 많은 이들이 좋아한다. ‘많은’이라고 써놓는 이유가 있다.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안고 사는 사람들은 때때로 위로가 필요하다. 그림에서 절망감만 느낀다면 사실 실패한 감상이다. 해석은 평론가 몫이 아니라 관객 몫이다. 몰입은 어떤 일을 잊고 싶어 발버둥을 치는 일 아닌가. 우리는 고해(苦海)를 어쩌든지 빠져나가려 안간힘을 쓰는 존재들 아닌가 말이다.

햇볕 속의 여자

호퍼는 인간을 공간에 둔다. 이 책 주제는 그 공간을 읽어 내는 일이다. 가령 ‘햇볕 속의 여자’를 보자.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침대 옆, 피다 만 담배를 들고 나체로 서 있는 여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름다운 몸매를 자랑하는 게 아니다. 그저 평범한 여성이다. 섹스 후 떠난 남자를 떠올리는 무리수는 두지 마라. 그녀는 그냥 빛을 받고 싶고 빛이 주는 따뜻함에 지난 밤 고단을 이기고 싶은 우울함 자체다. 약간 벌리고 선 두 발 뒤로 길게 이어진 그림자는 그녀 과거가 아닐까?

이렇게 호퍼는 사람과 사물을 세워놓고 빛과 그림자로 대답을 대신한다. 감추고 싶은 일을 드러내는 공간과 잊지 않으려 애쓰는 시간이 만든 한 장면, 스틸(still)이다. 한 번도 이상한 그림을 그린 적 없다던 에드워드 호퍼가 남긴 빛과 그림자는 그에게만 종속된 일이 아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또 미래로 걸어오는 이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손 잡음이다. 추상표현주의에 떠밀려 그는 인기가 사라지고 어느 날 자신이 일하던 스튜디오에서 목숨을 놓았다.

무심(無心)에 감추어진 유심(有心). 오늘 밤 지새우는 그대여 쓸쓸타 말할 일 아니다.

 

카페 L에서 만난 에드워드 호퍼 작품들 앞에 선 필자

저작권자 © 양산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