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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21] 매혹, 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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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21] 매혹, 치명, 운명, 그 어떤 말이어도…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2/01/07 13:32 수정 2022.01.07 13:36
화가의 친구들/ 이소영

이기철
시인
유안진 작가 에세이,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는 읽을 때마다 마음이 더워진다. 그 따뜻하고 설레는 동행이라니. 아니, 어떤 경우에는 쓸쓸함조차 행복으로 둔갑시키기도 하니 오랜 함께는 참 아름다운 일이다. 벗 사이 맑고 고귀한 사귐을 뜻하는 말이건대 매우 두터운 정을 일컫는 ‘금란지계’(金蘭之契)와 더불어 사랑받는 말이다.

오래 가슴에 새겨둔 문장,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지 않다. 나의 일생에 한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기를 바란다’. 이런 동무 있다면 한 생은 빛나고 영원에까지 닿을 일이 틀림없다.

그런 사람들 이야기가 한없이 펼쳐지는 책, ‘화가의 친구들’을 오랜 시간 두고두고 읽었다. 한꺼번에 읽어치우기는 아까운 인연이었기에 말이다. 울컥, 왈칵, 허망, 체념, 치명이라는 단어가 무시로 충돌하고 출현하고 빛나고 사라지곤 했다. 그 어떤 말이어도 서늘한 운명이었음을 부인할 길 없다. 다만, 친구라고 뭉뚱그려 표현한 일에는 저자도 밝힌 바이지만 애매한 ‘관계’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의미가 손상되지는 않는다. 어떻게 불려도 그들은 하나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외로움이나 시름이 함께 뒤섞인 여정(旅情)이라 표현함이 옳다.

책, ‘화가의 친구들’ 표지.

우선 제목에 한참 머물렀다. ‘~와’ 대신 ‘~의’를 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나로서는 ~의에 대한 심한 거부감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더욱이 친구란 ‘나란히’가 더 어울리지 않겠는가. ‘같이’한 사람은 그를 꾸며 주는 토씨가 돼서는 안 된다. 몸말이 되는 게 마땅하다. 벗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가치’가 있으니 말이다. 의기투합이 만들어낸 평생은 한 사람만 돋보이게 만든 일이 아니라 늘 함께였기에 찬란한 마무리였다. 결론은 ‘의’와 ‘와’는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

이 책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보다, 어느 페이지를 먼저 넘겨도 상관없다. 지식을 구하려 들지 말고 상정된 인물에 몰입하면 된다. 알고 있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오해와 이해가 반반씩 드러나고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린다.

에드바르드 뭉크와 다니엘 유엘, 앤디 워홀과 장 미셸 바스키아, 폴 세잔과 카미유 파사로, 에두와르 마네와 문인 친구들, 오딜롱 르동과 아르망 클라보 등 만남, 우정, 인연이 이어진다.

프리다 칼로가 그린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


폴 고갱과 반 고흐 관계만 해도 그렇다. 그들이 고작 60일간 함께했던 시간을 이 모양 저 모양 수많은 스토리를 누에 실 짓듯 여기저기 펼쳐놓았지만 ‘해바라기’로 남긴 그림은 애증(愛憎)도 영욕(榮辱)도 결국은 ‘함께’였음을 알게 한다.

‘노란 집’에서 충돌하고 충만했던 시간은 결국 ‘노란색 해바라기’로 서로 기억했다. 비정했던 악인으로만 비친 고갱이라고 그를 비난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서로 짐이 된 사이가 아니라 꿈이 된 인연이었으니.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는 또 어떤가? 사람들은 매정함만 기억하고 그 일로 힐난하고 흠집을 내려는 속성이 있다. ‘My Destiny’는 누가 시킨 일이 아니라 자진(自進) 혹은 자진(自盡)이다.

디에고가 프리다를 처음 만난 날, 그는 멕시코 교육부 건물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한 소녀가 다가왔다. ‘나는 놀러 온 게 아니예요. 먹고 살기 위해 그림을 그려야 해요. 좋은 화가가 될 자격이 있는지 말해주세요’. 디에고는 개성 있는 그녀 작품을 칭찬했고 그녀는 화가로서 길을 걷게 된다. 그녀가 그날 가져온 세 그림 중 하나, ‘벨벳 옷을 입은 자화상’은 첫 공식 작품이다.

프리다는 ‘일생, 두 번이나 심각한 사고를 당했다. 하나는 나를 부러뜨린 전차, 다른 하나는 디에고다. 두 사고를 비교하자면 디에고가 더 끔찍했다’고 말했지만 둘은 협력했고 업적을 이뤘다.

폴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하지만 이 책에서는 또 한 사람 연인이자 친구였던 포토 그래퍼, 니콜라스 머레이를 주목한다. 머레이가 찍은 프리다 자화상은 90여점. 그녀는 그렸고 그는 찍었다. 한 사람 생애를 이해하는 방법은 여러 각도에서 살펴봐야 한다. 확장을 통해 이해는 깊이를 더하게 마련이다.

친구, 우정. 이런 단어에만 매몰되면 이 책 읽기는 실패로 끝날지도 모른다. 물론 파블로 피카소와 거트루드 스타인과 나눈 우정도 있다. 화가와 후원자이기도 했지만 모델, 비평가로서도 관계를 맺었다. ‘친구’에만 방점을 찍을 일은 아니다. 결국, 관점을 어디에 두고 보느냐가 중요하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말아 후회하지 말아’라고 노래한 가수는 노사연이지만 이 책엔 쌓여있는 ‘사연’이 수두룩하다. 국내 화가들만을 다룬 ‘화가의 친구들’을 기대하면 욕심이려나?

저자 이소영 씨는 미술사와 과학이라는 두 장르를 아우른 ‘실험실의 명화’, 도구로 본 미술 역사를 다룬 ‘화가는 무엇으로 그리는가’, 생태도시 프라이부르크를 가족과 여행한 후 펴낸 ‘엄마도 행복한 놀이터’ 등을 썼다. 현재 수원에서 책방 ‘마그앤그래’를 운영하고 있다.

 

파블로 피카소가 그린 ‘거트루트 스타인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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