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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23] 눈부시지도 않아도 충분히 좋은 하루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2/02/04 09:51 수정 2022.02.04 09:51
하루 한 생각/ 한희철

이기철
시인
일기는 매일 써야 한다는 생각을 대부분 사람은 가지고 있다.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초등학교 때는 방학 숙제 중 가장 큰 고민이 일기였다. 날마다 무엇인가를 기록해야 하는 일, 별일 없어도 뭔 일이 있었던 냥 꾸며야 했던 진땀 나던 그때. 드디어 방학이 끝날 즈음이면 몰아 쓰기 신공을 발휘해 마침내 위대한(?) 작품을 완성했던 거짓말 뭉치. 하지만 하늘이 노래지던 일기 짓기도 따지고 보면 시절을 키워 준 훌륭한 거름이었다.

친구들과 놀기 바빠 일기 같은 숙제는 아랑곳하지 않던 그때는 후회가 아니라 추억이다. 차츰 세월이 흐르고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그 어른은 다시 추억으로 걸어 들어가는 순환. 돌이킬 수 없고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생각만 남았다.

목회자인 저자가 대신해 상기시키는 하루, 그때, 후회, 다짐, 그래도 살만한 매일을 기록했다. 시인, 동화작가 등 다양한 이력에 목회자이기도 한 한희철 작가가 일기처럼 지나가는 생각을 붙잡아 쓴 ‘하루 한 생각’.

별생각 없이 지낸 하루도 그런대로 의미 있겠지만, 그런 하루 치가 모여 어디로 가고 있는지 중요하다는 생각을 꼼꼼하게 정리한 글이다. 이유는 그 한 생각, 한 걸음이 모여 원하는 바가 만들어지기에 말이다.

‘하루 한 생각’ 책 표지.


오래전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원도와 충청도, 경기도가 만나는 작은 마을 부론면 단강마을에서 15년간 농촌목회를 한 이후 독일 프랑크푸르트 교회에서 6년간 이민목회를 마치고 지금은 돌아와 서울이라는 도시, 한 교회에서 그럭저럭 사는 사람을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배려를 실천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그 어디서나 자신을 빛내려 하기보다 주위를 밝히려 애쓰며 ‘눈부시지 않아도 좋은’ 하루를 열어간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말을 인용한 머리글은 ‘하루’에 대한 명징한 의미를 깨닫게 한다. ‘나의 일기는 추수가 끝난 뒤 들판의 이삭줍기다. 일기를 쓰지 않았더라면 들에 남아서 썩었을 것이다’

생각도 그렇다. 단단한 열매 속에 갇혀있지만, 드러내는 순간 생명을 탄생시키는 씨앗이 된다. 그 씨앗을 싹틔워 길러내는 시간은 그렇게 소중한 법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책은 잔잔하다. 지나간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물결처럼 그렇게 스며든다. 목소리로 전하려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전하는 탓이다. 책 목차는 1월부터 12월까지 일정을 순서대로 써 뒀지만, 첫 페이지부터 읽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마지막 글이 마음에 먼저 다가온다.

‘세상 고마운 말, 난 괜찮아’. 로마인들은 편지를 쓸 때 ‘시 발레스 베네, 발레오’(Si vales bene, valeo)라는 인사말로 시작한단다. ‘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습니다’라는. 얼마나 든든한 안부인가.

생각은 근심 걱정덩어리가 아니다.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이고 통로며 길이다. 혼자만 탈출하는 비상구가 아니라 이웃에게도 가르쳐주는 방편이다. 필자는 이 책을 묶은 이유는 빚을 갚기 위해서라고 했다. 다만, 그 ‘빚’을 ‘빛’으로 발현시키기 위한 마음 나눔이다. 꿈꾸기(dream)보다 자기 헌신인 ‘드림’에 더 익숙한 목자다. 그는 커피콩으로 치면 ‘결점두’다. 생두 속에 혼합돼있는 불완전한 커피콩. 하지만 그렇다 해도 풍기는 고소함이나 맛은 그리 나쁘지 않다. 좀 부족한 게 때로는 무결점보다는 낫다. 글 곳곳에 숨길 수 없는 겸손과 사양이 이를 증명한다.
2월 어느 날 쓴 ‘누군가가’라는 글.

‘누군가가 아름다운 건 그가 그 다울 때/ 기웃거리지 않을 때//누군가가 든든한 건 그가 자기 자리를 지킬 때/ 흔들리지 않을 때// 누군가가 고마운 건 그가 선 곳에서 넉넉할 때/ 눈길 닿지 않는 곳/ 외진 곳에서라도’

추천 글을 쓴 가수 홍순관 씨는 이 책에 대해 ‘하루하루 모든 사물과 현상 앞에서 ‘만들어진 언어’ 이전에 ‘선험적 언어’를 묵상함’으로 일궈낸 글임을 깨달았음을 말한다. ‘비움’과 ‘다움’을 아는 사람은 ‘움’을 틔울 줄 안다.

한희철 작가가 지은 책으로는 열하루 동안 비무장지대(DMZ)를 걸은 기록을 남긴 ‘한 마리 벌레처럼 DMZ를 홀로 걷다’, 그가 천착해오고 있는 우리말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 시대 모순과 어둠을 향해 통곡하는 심정을 담은 ‘예레미야와 함께 울다’ 등이 있다. 동화책으로는 ‘내가 지은 거미줄은’ 등.

지은 책을 통해 작고 외롭고 보잘것없은 모든 것들에 따뜻한 품을 내주고 있다. 묵묵히 마음 밭을 갈고 글 밭을 가는 산자락 천수답을 일구는 농부처럼 ‘하루’를 이끄는 사람, ‘길잃은 양은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안고 가는 게 맞다’고 말하는 목자를 만나는 일도 썩 괜찮은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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