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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남종석의 문화 산책] ‘라스트 듀얼’ 혹은 중세와 현대..
오피니언

[남종석의 문화 산책] ‘라스트 듀얼’ 혹은 중세와 현대의 사이에서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2/02/09 14:41 수정 2022.02.09 14:41

남종석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지난 설 연휴 동안 리들리 스콧 감독의 ‘라스트 듀얼’을 봤다. 영화는 흑사병이 지나간 14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실화였던 강간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상인계급의 딸 ‘마르그리트’(조디 코머 역)와 전사계급인 그의 남편 ‘장드 카르주’(맷 데이먼 역), 남편의 경쟁자인 ‘자크 르구리’(애덤 드라이버 역)라는 세 캐릭터의 서로 다른 기억이 쟁점이다. 르구리가 카루주 부재 시에 그의 부인 마르그리트를 범하지만, 르구리는 이를 사랑이라 주장하고 마르그리트는 강간이라 고소한다. 남편 카르주와 르구리는 ‘최후의 결투’로 진실을 가른다.

르구리를 연기한 애덤 드라이버는 기억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인간이 타인을 사랑할 때 어떻게 대상을 인식하는가를, 우정과 이해관계의 선택에서 갈등하면서도 현실적인 판단을 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스타워즈의 다크 제다이에서도 그의 표정에는 늘 고뇌와 연민 속에 악한 존재가 되는데, 이 영화에서도 드라이버의 표정에는 선한 의지와 욕망이 교차한다. 어느 쪽이 진정성인지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그의 강간은 그에게는 사랑이고, 상대도 동의한 바의 일부를 행한 것이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이렇게 위로하면서도 결혼한 여성과 간음을 한 것에 대해서는 신에게 용서를 빈다. 죽음 앞에서도 그가 자신의 죄는 사랑이었다고 외치는 모습은 그 자신의 이런 의식의 반영이다. 마르그리트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나? 그녀는 분명 나를 좋아했음이 틀림없다.

프랑스 정신분석 대가 자크 라캉은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고 했다. 자아의 실체는 그의 ‘표상된 의식’이 아니라 의식의 조건이 되는 ‘신체의 욕망’에 있다는 의미다. 다른 말로 하면 자아란 자기 스스로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존재다. 이인화는 이를 소설 제목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로 빼어나게 표현했다.

자기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아가 타자를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타자에 대한 모든 이해는 자기 스스로가 창조한 것의 일부일 뿐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연인들은 서로 상대를 알지 못한 채 사랑한다. 르구리가 마르그리트를 탐하는 것은 르구리에게는 상대방의 암묵적인 동의가 전제된 지극히 상호적인 것의 표현일 뿐이다. 그의 ‘욕망’은 이렇게 그의 ‘의식’이 되고 ‘기억’이 된다. 다만. 그가 ‘노(No)’는 ‘노(No)’일 뿐이라는 오늘날 페미니스트들 주장을 알지 못했던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르네 마그리트 『연인들』

마르그리트의 남편이자 장 드 카루주 역을 맡은 맷 데이먼은 사람을 죽이는 것 외에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중세 전사계급(기사)의 참모습을 드러낸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기사의 목숨을 건 전투는 우아함이나 명예와는 아무런 관련 없는 무의미한 야만을 표현할 뿐이다. 죽은 리구리의 신체는 도축장에서 살갗이 벗겨진 동물의 사체와 같다. 감독은 이 무모한 전투에는 어떤 숭고함도 존재하지 않음을 매우 인상적으로 표현한다.

리들리 스콧은 이미 ‘킹덤 오브 헤븐’에서 십자군 원정을 나갔던 중세 유럽 기사들이 얼마나 야만족이었는가를 세밀하게 묘사한 바 있다. ‘기사도 정신’이든, ‘노블레스 오블리주’든 중세 귀족을 미화하는 대부분 표상은 현대 서구 중심주의자들이 자기 역사를 각색한 결과로 탄생했음을 기억해 두자. 이 영화에서 맷 데이먼은 중세 전사계급의 실체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루르와 마르그리트의 갈등에 소품 역할을 충실히 한다.

마르그리트 역의 조디 코머의 순간순간 표정은 그녀의 복잡한 심경을 다층적 드러낸다. 그녀에게 남편과 섹스는 준강간과도 같다. 조국을 배반한 상인계급 출신의 딸이 귀족(기사계급)의 진정한 부인이 되기 위해서는 금전만 받쳐서 될 일은 아니다. 14기 프랑스는 봉건제의 일반적 위기로 인해 귀족은 경제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하고, 부르주아의 지위는 점진적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권력은 여전히 귀족에게 있고, 그녀의 아비는 남편이 될 이에게 딸의 지참금도 제대로 바치지 못했다. 서유럽이든 아시아이든 중세의 계급 간 거래(귀족과 부르주아 간 거래이든)이든 계급 내 거래(귀족과 귀족 간 거래)이든 여성의 몸은 언제나 그 수단이다. 몸은 당연히 남성의 소유물이 되고 더 나아가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만 중세 지배계급의 배우자로서 완전한 존재가 된다. 남편이 강요하는 섹스는 그녀에게 어떤 선택권으로 주어진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강간과 어떻게 다른가?

그러나 지적이며 자의식이 강하고 현실주의적이며 집안 경영마저 잘하는 여성이, 경직되고 가부장적이며, 싸움밖에 할 줄 모르는 무식한 전형적인 중세 기사계급에 어색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난봉꾼 기질이 있지만 동시에 지적인 동료(라틴어를 읽는 자)이자 매력적인 남성이기도 한 르구리에게 마르그리트의 관심이 끌리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남편의 화해 제스처로 제안된 키스에서 그녀는 순간적이지만 남편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어떤 감응을 받았을 수도 있다. 누가 알겠나?

다만, 그녀는 르구리의 섹스 요구에 대해 ‘노(No)’라고 분명히 말했고, 그것은 그녀의 내면이 무엇이든 발화된 사실이며, 주체의 의지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 의지와 무관하게 강압적으로 진행된 섹스는 겁탈(강간)일 뿐이다. 더불어 그녀는 그것이 겁탈이었다고 공개적으로 진술하기조차 했다. 중세 가톨릭의 무지와 권력 관계를 고려했을 때 마녀로 몰려 처형될 가능성이 매우 큰 상황에서도 그녀가 강간을 고수했다면, 그건 강간이지 다른 무엇이 아니다. 이것이 감독 리들리 스콧이 해석하는 진실이다. 아니 원작을 각색해 시나리오를 쓴 벤 애플렉과 맷 데이먼의 입장이기도 하겠다.

작가이자 역사가로서 원작자가 발굴한 당대의 1차 사료를 통해서도 실제 그것이 강간이었는지 제대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사건에 대해, 리들리 스콧은 마르그리트의 발화된 언어를 그녀의 ‘주관적 진술’이자 동시에 ‘보편적 진실’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마지막 장면에서 진실(truth)이 여러 번 언급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No)’는 ‘노(No)’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나탈리 저먼 데이비스의 저작이자 영화로 만들어진 ‘마르탱 게르의 귀향’과 유비된다. 이 미시사의 역작에서도 프랑스 중세 한 여성은 자신의 책략(주체적 개입)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재구성한다. ‘라스트 듀얼’에서도 마르그리트는 주체적 개입을 통해 진실을 알린다. 처형 위협을 무릅쓰면서까지 말이다. 이는 전사계급의 두 남성이 벌이는 무의미한 결투와 극히 대조된다. 하여튼 여든 살을 넘은 노인이 이런 영화를 만들다니. 다들 분발하자.

 

‘라스트 듀얼’과 ‘마르탱 게르의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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