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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송철호의 양산 이야기 8] 만해 한용운과 통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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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철호의 양산 이야기 8] 만해 한용운과 통도사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2/02/17 10:40 수정 2022.02.17 10:42

송철호
고전문학 박사
1.
만해는 불교를 대중에게 쉽게 알리는 데 관심이 많았다. 그는 선과 교는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며, 따라서 이 양자의 이론적 합일과 실천이 불교 진흥의 관건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대부분의 다라니가 산스크리트(Sanskrit) 음역(音譯) 위주로 암송되고 있어서 한글화 작업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만해는 대장경의 우리말 번역에 심혈을 다했다. 그는 현대 포교의 요체는 문서에 의해서 널리 알리는 것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대부분 한문으로 돼 있어서 일반인들이 읽고 이해하기 어려운 불경을 쉽게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봤다. 만해의 『불교대전』은 바로 그와 같은 시도의 결정이다. 『불교대전』은 만해가 팔만대장경 핵심 부분만 뽑아내 간행한 것이다.

만해는 경전에서 간추린 인용구를 총 9개 품(品)과 32개 장(章), 189개 절(節), 항(項)으로 분류해 수록했다. 품과 품에 속한 장, 절, 항 등에 적합한 내용의 불교 경전 구절을 대입시키고, 그 핵심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주제어를 각각 달아 일목요연하게 구성했다. 총 9개 품은 ‘서품(序品)’, ‘교리강령품’, ‘불타품’, ‘신앙품’, ‘업연품(業緣品)’, ‘자치품(自治品)’, ‘대치품(對治品)’, ‘포교품’, ‘구경품(究竟品)’이다. 만해는 ‘경전의 민중화’와 ‘문자로의 선포’라고 표현할 정도로 역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결국, 『불교대전』은 바로 만해의 대중교화, 포교, 역경에 대한 사상과 실천 의식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제6 자치품’과 ‘제7 대치품’은 『불교대전』에 담긴 만해 사상의 핵심과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품이라 할 수 있다. 먼저, 두 품에 인용된 경전 수가 전체 인용 경전의 약 60%에 이르는 만큼, 만해가 제6품과 제7품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불교대전』을 편성했는지를 알 수 있다. 『불교대전』은 1914년 4월 국반판 800페이지로 부산 범어사에서 간행됐다.

2.
『불교대전』은 비록 범어사에서 간행됐지만, 만해가 출판의 마음을 얻고, 집필을 위한 자료를 모으고, 실제로 집필한 곳은 모두 통도사다. 불교 교리를 일반 대중에게 쉽게 알릴 수 있는 개론서가 있어야겠다고 다짐한 만해는 1912년 여름 양산 통도사에서 『고려대장경』을 한 권, 한 권 열람하기 시작했다. 만해는 장경각에 있는 고려대장경 1천511부, 6천802권을 빠짐없이 열람했으며, 이를 현대적 언어로 변용해 요약 정리했는데, 이에 대한 초록 본만 444부에 이른다고 한다. 만해가 『불교대전』 집필을 위해 통도사에 머무른 시간은 2년이다. 2년 동안 만해가 머물렀던 곳은 백련암으로 알려졌다. 통도사 백련암은 당대 고승들이 많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사명대사가 주석한 적이 있고, 화엄의 일인자로 알려진 환성대사가 머물기도 하였으며, 구한말에는 당대 대강사이며 사경승인 경운 스님이 머물면서 법화경을 사경하기도 했다. 20세기 초엽에는 경허 스님이 백련선원을 개설했으며, 성철 스님이 두 철 동안 동안거를 보내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는 피난길에 나섰던 탄허 스님이 강원을 개설하기도 했다.

만해는 통도사에서 집필만 하지는 않았다. 그는 통도사 불교 전문 강원에서 강의했는데, 그때 그에게서 『화엄경』을 배운 법제자가 경봉 스님이다. 만해와 경봉은 『화엄경』을 통해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을 함께 고민한 스승과 제자였다. 1930년대 중반 일제의 황민화 정책이 극심해질 때 통도사 구하 스님과 경봉 스님이 만해를 통도사에 모신 적이 있다. 요시찰 인물로 늘 갈 곳이 마땅하지 않았던 만해를 걱정한 경봉 스님이 사형인 구하 스님에게 통도사에 모시자고 제안했고, 사찰 내 동의를 얻어 만해를 통도사에 모시게 된 것이다. 이때 구하 스님은 통도사 일주문 옆 큰 바위에다 ‘만해 한용운’이라는 기념글자를 새겨 넣어야겠다고 했는데, 만해가 “나는 돌에다가는 내 이름을 안 새깁니다. 나는 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내 이름을 새기면 새겼지 돌에다가 내 이름을 새기지 않겠습니다”라고 거절했다고 한다. 경봉 스님은 1967년 탑골공원 안 만해 한용운 선사 추모비 ‘용운당 대선사비’ 건립을 실질적으로 주도했으며, 1979년에는 만해 한용운 선사 탄생 100주년 기념해, “문 앞의 복사꽃 오얏꽃 이려 바빠서 옛 부처 마음 붉게 만 송이에 뱉었네”라는 추모시를 남기도 했다.

3.
만해는 신평마을 장터 만세운동과도 관련이 있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지 10여일이 지난 1919년 3월 13일 통도사 앞 신평마을 장터에서 장날을 맞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하북면 인근의 주민과 상인이 주축이었는데, ‘3.13 신평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통도사 스님들이었다. 서슬 퍼런 일제 치하에서 통도사 스님들이 주도한 시위는 동부경남에서는 처음으로 궐기한 만세운동으로 평가받는다. 1919년 8월 조선헌병사령부 ‘종합보고서’에는 “3월 29일 양산 하북면 신평시장에서 통도사 부속 보통학교 및 지방학림 생도 4~50명, 동(同) 불교 전수부 생도 약 10명, 그리고 불령(不逞) 승려 약 10명이 주모자가 돼 시위운동을 감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날 만세운동은 통도사 출신의 오택언 스님이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3.1운동에 참여한 후 만해의 밀명을 받고 통도사 스님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 오택언 스님은 통도사 주지 구하 스님 후원으로 서울 중앙학림에서 유학하고 있었으며, 앞서 통도사에서 주석하며 『불교대전』을 집필하고 강사로 학인을 지도한 만해 스님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통도사 스님들이 주도한 ‘3.13 신평장터 만세운동’은 독립운동 불길이 경남 전역으로 퍼지는 촉매제가 됐다. 3월 27일, 4월 1일, 5월 4일까지 양산에서 만세운동이 이어졌고, 3월 31일 합천 해인사와 4월 4일 밀양 표충사에서도 스님들이 주도한 시위가 발생해 호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했다.

만해는 1937년 3월 『(신)불교』 1호에 실린 ‘불교 속간(續刊)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경남 3본산 회의의 결과로 역경원이 생겼다”라면서 “역경 사업과 『불교』 속간을 다만 3본산의 힘만으로 영원히 지속하겠다는 각오와 준비를 가지고 하는 것인즉 그들의 장도(壯圖)도 또한 경복(敬服)할 만한 것이다“이라고 높이 평가한 적이 있다. 여기서 3본산은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이며, 그 중심에 통도사가 있다. 한편, 만해는 “조선불교 전체의 급선무 중의 급무가 되는 역경 사업이나 불교지(誌)의 속간을 어찌 경남 3본산에만 일임하리오”라며 조선불교 전체의 관심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처럼 통도사와 만해 한용운의 인연은 그 사연이 깊다. 그런 만큼 통도사에는 만해의 정신이 남아 면면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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