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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26] 끝까지, 끝난..
오피니언

[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26] 끝까지, 끝난 후에도 남을…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2/03/18 10:09 수정 2022.03.18 10:11
LOVE/ 정현종 옮김

이기철
시인
‘기억 저장소’인 앨범을 들춰 볼 때가 종종 있다. 한 장씩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따라오는, 혹은 손에 잡힐 듯 묻어나는 시간은 그 시절로 인도한다. ‘그랬지. 그랬었구나’. 흐릿함을 선명하게 돌려주는 스틸 화면은 이내 빛바랜 영상으로 바뀐다. 그중에서 건진 가장 소중한 한마디는 사랑이다. ‘미워도 다시 한번’을 일깨우는 단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으며 보석보다 소중하다는 말, ‘사랑한다’.

시대와 시간이 주는 간극(間隙)조차 의미 없는, 누구에게나 소중한 역사다. 그런 사랑을 읽고 본 행복은 그저 느낌표 하나만 달랑 남기기에는 부족하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기획하고 이를 만들어 낸 사진집, ‘LOVE’. 퓰리처상을 받은 유명인도 있지만, 아마추어 등 전 세계 1백명 사진가들이 참여했다. 이 프로젝트 이름은 MㆍIㆍLㆍK. ‘Moments of Intimacy, Laughter and Kinship’ 즉 ‘친밀함과 웃음 그리고 가족에의 순간들’이란 단어들 첫 자만 따왔다.

사진집 ‘LOVE’ 표지.

사진은 ‘얼굴’을 중심으로 촬영했다. 사랑하는 사람들 말이다. 이 중에는 이미 ‘사랑했던’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사진은 정지된 장면이지만 영원히 이어진다. 사진가 게리 프리맨이 1998년 체코 모라비아 작은 마을에서 찍은 사진에 오래 머문다. 눈먼 아내가 침대에 누워있는 쇠약한 남편에게 점자로 된 동화책을 읽어주는 모습에서는 따뜻한 눈물이 맺힌다.

눈먼 아내가 침대에 누워있는 쇠약한 남편에게 점자로 된 동화책을 읽어주는 모습.

보도 사진가인 잭 다이킹가가 찍은 ‘불멸의 사랑’. 주인공은 작가 친구가 뇌종양으로 사투를 벌이던 마지막 몇 주간을 담은 사진이다. 미국 애리조나주 투손에 있는 자택에서 아내 린다가 보살핀 친구 마지막 나날들. 친밀하고 가슴 뭉클하다.

보도 사진가인 잭 다이킹가가 찍은 ‘불멸의 사랑’.

이 외에도 고단한 하루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엄마가 기다림에 지친 아이들을 쳐다보는 표정, 주위 시선은 아랑곳없이 만남을 격하게 표시 내는 연인, ‘늙은 데다가 아내는 매일 바가지만 긁어대서 매주 월요일은 쉽니다’란 문구를 내 건 구두 수선집 할아버지 등등.

‘늙은 데다가 아내는 매일 바가지만 긁어대서 매주 월요일은 쉽니다’란 문구를 내 건 구두 수선집 할아버지.

이 멋진 기획은 ‘탄생에서 마지막까지’를 아우르고 있다. 삶이란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는 여행 아니겠는가? 그 고단한 여정에 가장 필요한 ‘사랑’이 힘이라는 점은 말할 필요 없다.

맨 아래 사진을 자세히 보길 원한다. 전쟁 참혹성과 상징을 이야기할 때 자주 불러내는 이미지다. 여기에도 잘 모르는 메시지가 들어있다. 벌거벗은 채로 거리를 내닫는 소녀. 사연은 이렇다.

1972년 6월 8일, 당시 아홉 살 난 소녀, 판티 킴 푹( (Phan Thị Kim Phúc). 전쟁이 터졌다. 마을 안전한 곳에 숨어 있던 어느 날, 폭격이 시작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소녀는 사촌들과 뛰쳐나온다. 이내 폭발음. 네이팜탄이 사방에서 터지고 옷과 살갗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멈출 수 없었다. 달렸다. ‘농 콰! 농 콰!’(너무 뜨거워요! 너무 뜨거워요!) 소리 지르며.

AP통신 사이공 주재기자 현 콩 닉웃(Huunn Cong Nich Ut)이 찍은 사진이다. 이 한 장이 남긴 울림으로 베트남 전쟁뿐 아니라 전쟁 자체에 대한 사람들 시선을 바꿔 놓았다.

여기까지가 흔히 아는 이야기다. 하지만 푹(Phuc)은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진을 찍은 기자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나를 안고 인근 병원으로 뛰어갔다. 그것은 사랑에서 나온 행동이다’. 이후 그녀는 열일곱 번이 넘는 수술을 받고서야 목과 어깨를 움직일 수 있었다. 그녀 인생은 절망에서 벗어나 사람을 사랑하는 일로 점차 변해갔다. 그녀는 ‘네이팜탄 소녀’에서 유네스코 우호 대사로 전 세계를 찾아다니며 ‘사랑’을 전하고 있다.

 

전쟁통에 벌거벗은 채로 거리를 내닫는 소녀.

사랑은 흉터를 아물게 하는 명약이다. 이 사진집 미덕은 잊고 있었던 사랑이라는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

시인 정현종 선생이 번역을 맡았다. 그가 쓴 시, ‘섬’이나 ‘방문객’은 사람 이야기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라든지,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삶은 사람 준말이다. 살아가는 온통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랑뿐이다. 끝까지, 끝난 후에라도.

가수 심수봉 씨가 부른 ‘사랑밖에 난 몰라’를 들으면 참 좋을 시간이다.

‘그대 내 곁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땜에/ 내일은 행복할 거야/ 얼굴도 아니 멋도 아니 아니/ 부드러운 사랑만이 필요했어요/ 지나간 세월 모두 잊어버리게/ 당신 없인 아무것도 이젠 할 수 없어/ 사랑밖엔 난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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