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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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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32] 떳떳함을 가졌던 따뜻한 사람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2/06/10 09:14 수정 2022.06.10 09:14
역사 앞에서/ 김성칠

이기철
시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들이 설쳐대는 시대, 묵직한 느낌을 선사하는 책을 다시 꺼내 읽는다. 한번 보고 말 책이 있는가 하면 두고두고 찾아볼 이름도 있으니 말이다. 오래전 읽은 초판본에 이어 2018년 새로 고쳐 나온 책을 읽었다. 그렇게 호명돼 나온 상대가 전하는 말은 무지몽매를 일깨우고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힘이 있다. 분단이라는 오랜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툭하면 숨겨둔 무기처럼 혹은 ‘조자룡 헌 칼 쓰듯’ 들고나오는 이념 논쟁. 지긋지긋하다 못해 넌더리 난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참 다행히도 책 한 권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김성칠, ‘역사 앞에서’. 이 책은 한국전쟁 연구 권위자였던 역사학자가 남긴 유작이다. 1993년 발행 이후 스테디셀러를 기록했다. 해제(解題)와 교주(校註)는 정병준 선생이 맡았다. 김 선생 책은 그간 쓴 일기를 바탕으로 문헌 비판적인 검토와 정리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저자는 해방 후 서울 모습과 한국전쟁 발발, 북한 점령 시기 서울, 수복 상황 등 당시를 자세하게 설명한다. 개인 일기이기 때문에 공적 문서나 논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사실들을 세밀하게 알 수 있다.

해방 공간 시절, 그 유명한 ‘조선 역사’를 상재한 그가 1945년 9월부터 1951년 4월까지 기록한 이 일기는 생전에 출판된 적은 없다. 부인인 이남덕 여사(그녀도 오랫동안 교직에 있었다)가 남편 원고를 찾아내 출판을 감행했다. 부인이 이 일기장 내용을 출판하기로 한 결심은 아래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 민족사에서 동족상잔이라는 끔찍한 전쟁을 경험했던 6.25 한국전쟁을 당시 치열하게 대립했던 좌ㆍ우 어느 편에 서지도 않았고 또 어디로 피난도 못 가고 앉은 그 자리 서울 근교에서 전쟁을 겪었던 한 역사가의 눈을 통해 그 전쟁의 의미를 살피는 데 있었다’.

이 책은 그저 개인 비망록이 아니라 사료로서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무엇보다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당시 지식인이 가진 허위의식, 좌ㆍ우익 이데올로기 대립이 얼마나 몸서리치게 하는 일인지 알게 한다는 점.

이 외에도 국대안 파동, 해주 공격설, 제1차 서울 전투, 미아리 전투, 서울의대 부속병원 학살 사건, 1.4후퇴 등이 그려진다.

‘역사 앞에서' 책 표지. 초판본부터 양장 개정본까지.

김 선생은 부친 1주기인 중구절(구구절이라고도 하는 9월 9일)에 제사를 모시러 고향에 내려갔다가 괴한 총에 맞아 서른아홉 나이에 이 땅을 떠났다.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성대학을 졸업, 금융조합(현 농협)에 근무하던 그는 광복 후 사학자로서 길을 걷고자 금융조합에 사표를 낸다. 이후 모교인 경성대학과 경성법전에서 가르치며 가족과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낸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 소용돌이에 휩쓸려 서울에서 조선 인민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점령을 번갈아 목격하며 사학자, 자유주의자, 민족주의자로서 전쟁과 이에 휘말린 인간에 대해 일기로 쓰게 된다.

이 시기 마주친 정치인과 학자들, 그리고 당시 서민 삶은 물론 자신 주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을 세심하게 기록했다. 한편 1.4후퇴 직전, 시국 상황을 재빨리 간파하고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연구와 강의에 힘쓰는 등 바쁜 생활을 보내기도 했다.

새롭게 단장해 출간한 책은 초판 때 제외한 일기 39편과 기행문 1편을 추가, 일기첩 모두를 되살렸다. 특이한 점은 초판과 개정판에 들어 있던 고병익 회고담과 정병준 선생이 쓴 해제 및 교주(校註)는 제외됐다. 아마 고인 목소리에 더 힘을 실은 모양새다.

대신 일기에 등장하는 김 선생 셋째아들인 김기협(그도 역사학자다) 씨 서문, ‘아버지 일기를 떠나보내며’를 실었다. 또 추가된 글, ‘속리산 기행’은 법주사를 찾아가는 여정을 기록했는데 참 멋진 수필 한 편을 읽는듯했다.

6월은 이른바 ‘호국보훈의 달’이다. 참혹한 전쟁터에서 사라진 사람은 비단 군인뿐 아니다. 남아 있는 자가 감당해야 할 슬픔, 그 쓰라린 역사가 던져준 아픔은 이어진다. 전쟁은 그들 야욕이 만든 정치 산물이지만, 그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고 만다. 민중은 눈뜬 지 오래지만, 정치인은 아직도 애써 외면하고 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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