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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35] 둘러앉아 나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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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35] 둘러앉아 나누는 두레 밥상처럼…

양산시민신문 기자 mail@ysnews.co.kr 입력 2022/07/21 22:27 수정 2022.07.22 09:01
융합의 식탁/ 이영숙

이기철
시인
서문을 뜻하는 프롤로그를 잘 읽으면 그 책이 강조하는 마지막 부분인 에필로그를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다. 저자가 라틴어인 ‘아니무스(animus)’와 ‘아니마(anima)’를 먼저 언급하는 이유다.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이 말한 용어다.

아니무스는 여성이 지니는 무의식 상태에서 지닌 남성 요소, 아니마는 남성이 지니는 무의식인 여성 요소를 말한다. 하지만 나눠진 성(性)을 이야기하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엉켜’있거나 ‘내재’된 맥락으로 읽어주길 부탁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세상을 읽는 기준을 바꾸면 본질이 보인다’는 평소 생각을 독자에게 제공하기 위해서다.

시인이자 문학 산책을 권유하는 독서 교육 강사인 이영숙 작가 인문 에세이집, ‘융합의 식탁’은 매우 잘 차려진 한 끼 식사 자리로 초대한다. 그동안 읽고 사유한 흔적을 지우지 않고 공유한다.

이른바 ‘친절한 영숙 씨’. 하지만 대단히 영리하다. 목차에서 해당 내용 제목을 먼저 보여주지 않는다. 궁금 속에 숨겨진 해답 찾는 일은 독자 몫이다. 따라서 초대 손님은 제 자리를 찾아 착석(着席)해야 한다.


‘융합’이란 색다른 종류가 녹아서 서로 구별이 없게 만드는 일이라 쉬 도전하기엔 무리다. 시행착오를 거쳐 삶이라는 튼튼한 근육을 만들어 본 경험 있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능숙해야 이런저런 일을 맞닥뜨렸을 때 문제를 해결할 해법을 제시하는 능가(凌駕) 수준에 다다른다.

읽거나 쓰는 일, 가르치는 일 사이에 종종 각종 먹거리를 키우는 농막(農幕)에도 발걸음을 옮긴다. 상대를 대접하는 즐거움에 익숙하다. 특히, 야채피클은 이 무더위에 적합한 찬(饌)이 된다며 이는 ‘갖가지 야채를 융합해야 가능’하다고 한다.

‘여자는 상(床)을 들고 문지방을 넘으며 열두 가지 생각을 한다’는 속담이 있다. 자기 속마음을 밥상을 기다리는 남편에게 잘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다. 이 책은 그러하다. 섣불리 아무렇게나 성의 없이 차린 식탁이 아니다. 손님을 초대하는 자리 미덕은 융숭(隆崇)해야 한다. 산해진미(山海珍味)까지는 아니더라도 풍성함이 느껴지도록.

‘융합의 식탁’ 책 표지.

작가가 ‘읽은’ 모두는 ‘잘 익었다’. 성질과 맛이 다른 각각을 이렇게 잘 버무려 놓은 다이닝 테이블(dining table)이라니.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독서 후 얻은 경건한 통찰을 삶 가운데 적용하기 위해서.

총 5장으로 구성된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된다. 어느 페이지에 눈길이 닿더라도 새삼스러운 느낌을 받게 된다. 예를 들면 2장, ‘세잔의 본질을 보다’에서 만난 ‘시인 탐구 보고서’. 김경주 시인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 관한 느낌표다.

‘시인들은 이 세상에 없는 낱말과 계절을 찾아 순례하는 문장 등반가들’이라면서 시인이라는 저작자(著作者)는 ‘정말 이 세상에 없는 계절’임을 단정한다. 그 까닭은 ‘물리적 계절과 그들이 지닌 사단칠정(四端七情)은 보편적 해석으로는 불가능’해서라고.

책 내용은 시인에 관한 스토리가 많아 보이지만 적당하다. 온갖 사건이나 생각을 따라 좇아가며 적거나 말하는 서술(敍述)이 대단히 흥미롭다. 철학, 그림, 동화, 사회 현상 등 동서양을 넘나드는 글발이다. 심지어 TV 다큐나 드라마까지 독서 토론 자료로 사용한다.

그가 던지는 질문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올바른 해석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바르지 않음을 옹호하자는 게 아니다. 이분법으로 갈라치길 좋아하는 세상에서 시선이나 시점을 바꿔 생각하는 힘을 기르게 한다. 앞서 출간한 인문 독서 에세이집, ‘낮 12시’에 기록돼있다.

자신이 낸 시집, ‘은갈치와 어머니’에 관한 내용도 있다. 195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 유명한 작품, ‘노인과 바다’를 차용(借用)하며 글을 끌고 온다. 헤밍웨이가 바다를 ‘라 마르’(la mar), 즉 여성 공간으로 해석했듯 시에서 표현한 ‘은갈치’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이 땅의 자식들을 위해 차려낸 밥상’이라고 해석한다.

‘융합의 식탁’은 이렇게 타인을 위한 상차림이다. 넉넉하거나 부족하거나 상관없이 둘러앉은 두레 밥상이다.

시인이 남긴 말, 마무리는 시(詩)가 적절하다.

해가 물품으로 들어가면/ 바다는 조용히 해를 품고/ 밤새워 뒤척이며 자잘한 입덧을 한다// 쿨룩거리며/ 태동하는 은갈치의 환희/ 긴 꼬리로 활강하며 획을 긋는 무렵이면// 물품이 된 내 어머니/ 마른 가슴도 부표처럼 떠올라 흔들린다// 물비린내를 타고 솟구치는/ 은갈치 한 마리/ 주름처럼 펼쳐놓은 흰 밥상이/ 어머니가 차린 밥상이라는 것을 알 무렵이면/ 육지로부터 빈 소주병 하나 밀려와 밥상을 서성인다. <이영숙, ‘은갈치와 어머니’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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