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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빛과 소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오피니언

[빛과 소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2/09/20 13:57 수정 2022.09.20 14:01

박동진
소토교회 목사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한다. 여기 나오는 ‘화평’이라는 말과 ‘평강, 평안, 평화’ 모두 같은 뜻이다. 화평을 헬라어로는 ‘에이레네’라고 하고, 히브리어로는 ‘샬롬’이라고 하며, 라틴어로는 ‘팍스’라고 한다.

‘팍스 로마나’라는 말이 있다. 로마 전체 역사에서 아우구스투스 황제부터 마르쿠수 아우레리우스 황제까지 약 2백년간 지속한 기간을 두고 말하는데, 고대는 물론 현재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번성한 시대였고, 아마 세계에서 가장 긴 평화를 지닌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평화는 로마의 무력과 경제력을 통해 이뤄진 것이며, 로마인을 위한 평화였다. 요즘은 ‘팍스 아메리카나’라고 한다. 그 당시 로마처럼 초강대국 힘을 가진 미국이 세계를 주도하는 평화이다. 그래서 미국이 건재해야 평화가 있고, 미국이 없으면 평화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힘이 있어야 평화가 있다. 평화는 지켜질 때 의미가 있다’는 말은 마치 만고불변 진리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모든 나라는 자신들 평화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하든 힘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것이 가장 중요한 국가 과제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 힘에 의한 평화 이면에는 힘에 억눌린 자들의 고통이 있다. 최선의 수비는 공격이라는 말이 있듯이 힘이 있으면 위협이 될만한 화근을 미리 없애버려서 자신의 평화를 지키고자 한다. 그래서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하며, 나의 평화를 위해 타인을 억누르고 지배하며 착취한다. 힘이 있으면 이런 것들을 누릴 수 있는 수혜자가 되고, 힘이 없으면 피해자가 된다. 그래서 힘에 의한 평화는 늘 위험하며, 비극이 숨어 있다.

성경에서 평화의 가장 근원적인 말은 히브리어의 ‘샬롬’에 있다. 그런데 이 샬롬은 단지 전쟁이 없고, 다툼이 없는 것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샬롬은 ‘완전하다, 건강하다, 성취하다’는 말의 명사형인데, 요즘 유행어처럼 사용하고 있는 ‘웰빙’이라는 말이 더욱 적합한 의미라 할 수 있다. 즉, 평화라는 것은 분쟁과 싸움이 그치는 것과 함께 여기에 다툼으로 인한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돼 건강해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 화평은 샬롬을 말한다. 예수는 이 샬롬을 우리에게 주겠다고 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힘에 의한 평화, 곧 깨어질 위태위태한 평화가 아닌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한다. 예수가 주고자 하는 평화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성경을 보면 예수는 상당한 능력자이다. 지식과 지혜에 있어서도 탁월했고,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력 또한 탁월했다. 거기다 그는 이적을 행하는 능력까지 있었다. 자연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었고, 마귀와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었으며, 나병까지도 치료하는 능력자였다. 또한, 사랑과 자애가 넘치는 인격자였고, 범접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능력자였다.

그는 이 능력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그에게 오는 모든 이를 품었으며, 이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치유했다. 병을 고쳐줬고,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줬으며, 실의에 빠진 이들의 삶을 회복시켜 줬다.

또한, 예수는 ‘대속제물’이 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말한다. 대속제물은 죄 많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죄 없는 짐승이 대신 죗값을 치르는 제물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 희생양이라고 한다.

예수는 죄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희생양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의로운 자의 불의한 죽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을 수 있도록 자신이 희생양이 돼 치른 죽음이다. 이 죽음으로 우리 인류는 하나님께 용서받게 됐고, 죄인이 아니라 죄를 용서받은 자의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던 예수, 스스로 희생양이 돼 죽은 예수를 다시 살아나게 하셨다. 예수는 부활했다. 그리고 이 부활의 생명을 우리에게 줘 우리도 부활하는 새 생명으로 살아가게 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것이 예수의 평화다. 예수는 이 평화를 우리에게 주고자 하신다. 힘으로 남을 억압하고 새로운 비극을 만들어가는 그런 처참하고 위태로운 평화가 아니라, 그 힘으로 남을 유익하게 하며, 서로 용서하고 아픔을 치유하며, 다시 살아가게 하는 평화다. 예수는 우리가 이런 평화를 이루어가는 사람이 되라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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