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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철호의 사기 열전 3] 백이ㆍ숙제, 공자가 있어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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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철호의 사기 열전 3] 백이ㆍ숙제, 공자가 있어 그들이 있다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2/09/26 09:21 수정 2022.09.26 09:21

송철호
고전문학 박사
1.
백이와 숙제는 동양 문화권에서는 긴 세월 동안 충절의 대표 인물이다. 사마천은 『사기 열전』에서 백이와 숙제에 관해서 상세히 다루고 있다. 그는 백이와 숙제가 후세에 널리 알려진 것은 순전히 공자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사마천 자신은 백이와 숙제 대한 생각이 공자와는 달랐다. 사마천은 공자가 고대의 어질고 성스럽고 현명한 사람들을 차례로 열거하면서, 오나라 태백이나 백이의 이야기는 상세히 하면서도 의로움이 지극히 높다고 알려진 허유와 무광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다.

허유와 무공은 모두 왕위를 거부한 인물이다. 요 임금이 만년에 이르러 자신의 자리를 허유에게 양보하려 하자 그는 한사코 거절한 다음 기산 아래로 도망쳐 몸소 밭을 갈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후에 요 임금이 다시 그를 불러 구주의 우두머리로 임명하려 하자, 허유는 어지러운 소리를 너무 많이 들었다며 영수로 가서 자신의 귀를 씻었다. 은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치려고 무광에게 물으니, 무광은 세상일은 내 관여할 바 아니라며 상대하지 않았다. 탕왕은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얻어 나중에 무광에게 나라를 넘겨주려고 하니, 무광은 이것을 피해 돌을 메고 요수에 빠져 죽었다. 천자의 자리를 거부한 채 은거하거나 죽음을 택한 허유와 무광의 태도가 제후국인 고죽국 제후 자리를 거부하고 달아난 백이와 숙제의 태도에 비해 못할 것이 없음에도 공자가 이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백이와 숙제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2.
공자는 왜 허유와 무광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고 백이와 숙제에 대해서만 높이 평가했을까? 그 이유를 ‘효(孝)’에서 찾을 수 있다.

유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가 ‘효’다. 효는 인(仁)을 실천하기 위한 근본 마음이다. 효의 마음은 ‘부자유친(父子有親)’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마음이고, 자식의 부모에 대한 마음이 효다. 이 두 마음은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나온 천부적 마음이다. 유교는 이 마음을 길러서 남을 대해야 한다고 한다. 백이의 태도에는 효가 담겨 있다. 아버지 사후, 아버지 자리를 이어받으라는 숙제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가 생전 아버지 뜻이 동생 숙제에게 있었으므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버지의 뜻은 사후라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강한 효 의식의 발로다.

백이와 숙제가 서백(주나라 문왕)을 찾아간 이유가 ‘노인을 잘 모신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제후 자리를 마다한 그들이 다른 제후인 서백을 찾았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그 이유가 단지 노인을 잘 모시기 때문이라면, 오직 서백이 효를 실천하기 때문에 찾았다는 말이 된다. 서백, 곧 주 문왕이 죽고 그의 아들 무왕이 동쪽으로 상나라를 치려고 할 때, 백이와 숙제는 말머리를 막아서서, “아버지가 죽어, 장례도 치르지 않았는데 창칼을 들다니 효라 할 수 있겠소이까?”라고 했다.

효의 발전된 모습이 인이다. 백이와 숙제는 그 인을 실천한 인물이다. 그들이 주 무왕의 행차를 막으면서, “신하로서 군주를 죽이는 것을 인(仁)이라 할 수 있겠소이까?”라고 했다. 왕이 행차를 막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백이와 숙제가 그런데도 그렇게 한 것은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게 인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이와 숙제는 그 인을 어긴 사람과 함께 할 수 없어서 그 인을 지키기 위해서 수양산에 들어가 고비를 따 먹는 것으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죽음으로서 효의 가치를 내세우고 인을 지키려고 했으니, 유교 사상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백이와 숙제일 것이다. 공자가 백이와 숙제를 높이 평가하고 내세우는 건 당연한 일이다.

3.
백이와 숙제에 대한 공자와 사마천의 인식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백이와 숙제가 굶어 죽기 전에 남긴 시가 있다. ‘저 서산(西山)에 올라 / 그 고비를 뜯는다 / 폭력을 폭력으로 바꾸고도 / 그 잘못을 알지 못하는구나! / 신농, 우, 하는 이미 사라졌으니 / 우리는 어디로 돌아갈까나? / 우리는 죽음으로 간다 / 아! 운명이 가련하구나! - 『사기 열전』 권 61, ‘백이열전(伯夷列傳)’ 중-

공자는 “백이와 숙제는 지난 원한을 기억하지 않았기에 원망의 기운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어짊을 구하면 어짊이 얻어지니 원망한 것이 무엇인가?”라고 했다. 그에 대해서 사마천은 “나는 백이의 뜻을 슬프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이 남긴 시 구절을 보니 무엇인가 이상했다”고 했다.

나는 원한은 몰라도 원망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디로 돌아갈까나”는 말에는 갈 곳이 사라지고 없는 현실에 대한 원망이 서려 있다. “우리는 죽음으로 간다”는 말은 갈 곳이 없어진 현실에 대한 체념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이어진다. “아! 운명이 가련하구나”라는 말에서 자조 어린 슬픔이 느껴진다. 내가 섞일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원망이 느껴진다. 원망의 기운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는 공자의 말에 회의가 든다. ‘청절지사(淸節之士)’라는 백이와 숙제에 대한 인식이 작품의 해석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사마천은 “백이와 숙제가 비록, 어진 사람들이긴 했지만, 공자가 있어서 그 이름이 더욱 드러났다고 생각했다. 안연이 공부에 독실하긴 했지만, 천리마 꼬리에 붙음으로써 그 행동이 더욱 뚜렷해졌다. 동굴 속 선비들의 진퇴도 이와 같았지만, 그 명성은 연기처럼 사라져 입에 오르지 않았으니 서글프구나! 골목에 사는 보통 사람으로 덕행을 갈고 닦아 명성을 세우고자 한다면 청운의 선비에 붙지 않고서야 어찌 후세에 명성을 남길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백이와 숙제가 세상에 그 이름이 널리 높이 드러난 것은 순전히 공자에 의해서라고 본 것이다. “동굴 속 선비들의 진퇴도 이와 같았지만, 그 명성은 연기처럼 사라져 입에 오르지 않았으니 서글프구나!”, 백이와 숙제 같은 사람은 많건만 정작 백이와 숙제처럼 명성을 얻어 입에 오르지 못하고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사람들이 서글프다. 누군가가 그들을 기억하고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의 중요성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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