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양산시민신문

[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41] 따뜻한 분노,..
오피니언

[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41] 따뜻한 분노, 서늘한 위로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2/10/14 09:31 수정 2022.10.14 09:31
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 김남권

이기철
시인
‘나비가 남긴 밥’ 사연을 읽었다. 날갯짓 한 번에 담긴 수많은 고통을 동반하는 밥 한술. 배추벌레 안간힘과 비상(飛上)을 위한 전진. 제목이 한 사람, 걸어온 길과 닮았다.

김남권 시인 시집, ‘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

18년 전 ‘메밀꽃 필 무렵’ 주인공을 만나고 싶어 평창에 갔다가 눌러앉아 터 삼은 시인. 1.4 후퇴 때 월남한 아버지가 일궈놓은 가평 대금산 자락 오막살이 집 한 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그 시절을 불러내 나비 한 마리 날려 보냈다. 이웃이 없어 산짐승, 달빛, 별빛이 동무 돼 눈 맞춤하던 그때를. 시집에는 그 별들과 나비, 달이 중심이 돼 사람살이를 찬찬히 되돌아보게 한다.

사람 체온은 36.5도, 나비가 자기 몸을 데워 날아오르는 데 필요한 온도도 36.5도란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 일, 간단히 산수(算數)하면 73도지만, 언제나 100도 넘도록 끓어 넘치는 게 사랑이다. 나비 날갯짓도 그러하리라. 꼴랑 배추 이파리, 파리한 줄기만 남긴 한 끼가 든든했을까마는. ‘푸른 날개가 돋게’ 하기 위해, 마침내 그리해 ‘지상의 마지막 종점에서 도움닫기를 하며 푸른 창공’이 목적지인 곳으로 날아가는 저 장엄 몸짓.

‘김치를 담그려고 마트에서 사 온 배추를/ 다듬다가 수세미처럼 줄기만 남은/ 배추 이파리를 보았다/ 얼마나 달고 고소했길래 이파리의/ 뼈대만 남기고 갉아 먹었을까/ 어두컴컴한 배춧잎 속에서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며 통통하게 살이 올랐을 배추벌레들,/ 지금쯤 가을 하늘을 날고 있을까/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날개를 달아준 일이 없지만 오늘 사 온 배추 한 포기 속에서 통통하게 살이 올랐을/ 배추벌레들을 생각하면 가슴속에 등불 하나가 생긴다/ 배추벌레들이 먹고 남은 것들을 겨우 내 몸속에 채워 넣고 나면/ 내년 봄, 내 몸에도 푸른 날개가 돋아나지 않을까/ 지상의 마지막 종점에서 도움닫기를 하며 푸른 창공을 향해 달려갔을/ 배추벌레들의 날갯짓, 11월의 푸른 항공에 하얗다.’ <‘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 전부>

시집에는 윤동주, 이육사, 백석 시인도 동무해 숨겨둔 분노와 처절함도 안겨준다. 소란하지 않지만 우렁우렁한 시편들이다. 믿는다. ‘나비 효과’를. 이쪽에서 저쪽까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사랑을.

시집, '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 표지.

김남권 시인은 양보하는 사람이다.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라거나 ‘발신인이 없는 눈물을 받았다’는 편지에 가서는 그냥 와락 안고 싶다. 뿐만 아니라 동업자를 알뜰하게 챙기기로 유명하다. 겉으로 표시 내는 일도 없다. 조용하고 묵직하다. 시편에서 읽히는 따뜻한 동맹 혹은 결기.

‘고철 시인이 고철을 팔러 왔다가 짜장면을 사줬다/ 1kg에 280원 하던 고철값이/ 130원밖에 안 한다며 고철 판 돈 절반을 헐어/ 평창시장 골목 칠천각에서 짜장면을 사주고/ 고철이 다 된 1톤 트럭을 타고 멧둔재를 넘어갔다/ 도로공사를 하다 그라인더 날이 튀는 바람에/ 여섯 바늘이나 꿰맨 다리에 시의 붕대를 감고 절룩거리며/ 가난한 나를 찾아온/ 고철 시인은 고철 판 돈 절반을 헐어 짜장면 곱빼기를 사주었고,/ 덕분에 가난한 허기를 때운 나는 원동재를 넘어 영월로 갔다/ 내다 팔 고철도 없고 내다 팔 시도 없는/ 나는 ‘내가 자주 가는 집’에 들러 외상으로/ 막걸리에 산초 두부나 시켜 놓고/ 노가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고철 시인을 불러 늦은 저녁/ 세상 사는 이야기나 들어보는 수밖에,/ 그나저나 내 시는 1kg에 얼마나 받으려나/ 내일은 그동안 써놓은 원고 뭉치를 들고/ 고물상 저울에 통째로 올라가/ 더 쓸모없어지기 전에 비만한 몸뚱이나 팔아야겠다. <‘고철이 고철에게’ 전부>

김 시인은 최근 아이들 마음으로 날아가 유쾌한 웃음으로 피어나는 동시집, ‘선생님 복수 타임!’을 출간했다. 그간 펴낸 책으로는 시집 9권, 동시집 4권, 시 낭송 이론서 ‘마음 치유 시 낭송’ 등이 있다.

 

동시집, '선생님 복수 타임' 표지.

저작권자 © 양산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