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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48] ‘소확행’이란 그때를 불러오는 말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3/02/03 09:00 수정 2023.02.03 09:00
채소의 온기/ 김영주 글ㆍ홍명희 그림

이기철 시인
봄소식을 제일 먼저 알려주는 채소는 누가 뭐라 해도 ‘봄동’이다.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제 치레를 제대로 한 겨울을 이겨낸 얼굴이다. 노지(露地)에서 비바람, 눈 따위를 고스란히 맞고 자라난 그대로 ‘봄’이다.

배추 겉절이라고 하면 그저 그런 맛이지만 봄동 겉절이라 말하는 순간, 온몸이 순식간에 따뜻해진다. ‘납작 배추’라는 이름도 우스꽝스럽다. ‘포용’(包容)과 ‘포옹’(抱擁)을 떠올리게 하는 다정한 식탁을 만들게 하는 소박한 밥상 친구, 채소.

내가 먹은 채소에 관한 40가지 이야기라는 부제(副題)가 붙은 책, ‘채소의 온기’는 그런 기분으로 읽기 딱 좋다. 평소 그리 빛나는 명사(名詞)는 아니건만 언제나 손쉽게 취할 수 있는 먹거리인 채소. 인생이라는 단어를 앞장세워 하나하나 불러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를테면 농담처럼 ‘삶은 계란’을 ‘라이프 이즈 에그’라 하듯 ‘삶은 감자’, ‘단단하게 살아가기, 콜라비’, ‘약해지기 전에 마늘’이라든가 ‘알알이 기억되는 것들, 옥수수’라 부르면 얼마나 정겨운가 말이다.

‘채소의 온기’ 책 표지.

요리사도 아니고 식품영양학 전공자는 더더욱 아닐뿐더러 채식주의자도 아닌 두 사람이 엮어낸 ‘채소 이야기’. 그들은 왜 이런 영양가 있는 주제를 택해 쓰고 그렸을까? 모든 일은 찰나에 이뤄진다. 쓰는 사람 김영주 씨, 그리는 이 홍명희 씨는 ‘어느 날 갑자기’ 의기투합해 3개월 만에 이 주제를 완성시킨다.

콘텐츠 창작팀, ‘종이 밴드’를 만들어 활동해온 주인공들은 매번 ‘무엇’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다음에는 ‘어떻게’를 구상했고 즉각 실천에 옮겼다. 책 내용에 만들어 먹기 쉬운 레시피(recipe)도 그림으로 제공한다. 하지만 그런 점에 비중을 둘 필요는 없다. 가벼운 수필 한 편 읽는다는 마음으로 펼치면 잔잔한 감동을 받는다.

예를 들면 잘 구운 김에 뜨거운 쌀밥을 올리고 ‘달래장’을 살짝 곁들이면 하루 피곤했던 노동을 보상해주는 즐거움이 저절로 일어난다. ‘향긋하고 매콤한, 달콤하고 짭조름한’ 그 맛은 외면하기 힘들다. 혹여 다른 반찬이 일절 없다 해도 달래장 하나만으로도 허기를 맛있게 메꿀 수 있다. ‘소확행’이란 우리가 지나왔던 시절, 먹었던 음식에 묻어 따라온다.

또 하나, 겨울초라 말하고 ‘시나나빠’로 읽는 유채 나물이나 남해 시금치는 어떤가? 단맛에 거의 ‘자물시는’(까무러치는) 경험을 한 바 있다. 그리 싫어하던 나물 반찬도 나이 들수록 찾게 되고 손이 가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 신토불이(身土不二) 마음이 되살아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온기’는 ‘뜨거움’보다 의외로 오래간다. 아랫목을 기억하는 이들은 안다. 싸늘함이 오기 전 남은 불씨가 주는 마지막 배려. 바로 그것이다.

속지 삽화.

책은 모두 5장으로 꾸며졌다. 1장은 ‘토닥토닥 채소의 위로’로 시작한다. 이어 ‘인생은 채소처럼’, ‘두근두근 채소의 계절’, ‘파릇파릇, 채소의 힘’, ‘나와 당신 사이의 채소’. 종종 시비를 거는 이들이 있다. ‘채소’와 ‘야채’는 어떻게 다른가라고. 결론은 동일한 뜻이다. 굳이 차이를 구분하자면 채소는 밭에서 나는 먹을 수 있는 식물만 뜻하고 야채는 들이나 산에서 나는 먹을 수 있는 나물까지 포함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마침 내일(4일)이 입춘(立春)이다. 이날 어울리는 생채 요리가 있다. 매운맛이 나는 다섯 가지 채소로 만든 ‘오신채’(입춘채라고도 한다). 햇나물을 캐내 겨우내 섭취하기 힘들었던 신선 채소는 기운을 북돋우는데 최고다. 대파, 산갓, 당귀, 미나리 싹, 부추, 무순 등이 해당한다. 궁중에서 임금에게 진상한 음식이라지만, 어디 왕만 먹으란 법이 있는가? 봄빛 살아나는 어디라도 나서보면 남부럽지 않은 채소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마침 어제 필자에게 멀리서 보내온 온기 있는 선물이 도착했다. 올겨울 유난히 잦은 눈 속에 갇혀 길마저 끊겨 쓸쓸하고 고요한 적막(寂寞)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글 짓고 밥 지어 먹는 K 시인 닮은 호박과 부추 씨앗.

늙은 호박이야 호박죽 끓여 먹으면 될 일이지만 부추 씨는 좀 의아했다. 손바닥만 한 땅조차 없는데 말이다. 아, 그랬구나. 베란다 정원에 아이들 집을 짓고 뿌려놓으라는 신호다. 잘 자라기를, 생명에 관한 생각을 한시라도 잊지 않길 바라는 부탁.

채소는 초근목피(草根木皮)를 대신한 음식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를 살려온 보물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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