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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전범기업의 전후 배상이라는 쟁점..
오피니언

전범기업의 전후 배상이라는 쟁점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3/03/22 14:01 수정 2023.03.22 21:16

남종석
전국공공연구노조 정책국장
지난 3월 6일 정부는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제3자 배상방안을 발표했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일본이 지급한 보상금 혜택을 받은 국내 기업(당시 기준 공기업)들이 기금을 출연하고, 일본 기업들도 이 기금을 출연하도록 일본의 협조를 거쳐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보상한다는 취지다.

우리가 ‘전범기업’이라고 부르는 것은 나치 침략에 동조한 독일 기업이나 일본 군국주의 침략을 지원한 기업을 일컫는다. 2차 대전 종결 후 독일 전범과 일본 전범을 처벌하면서 이에 동조한 기업을 전범기업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국제법적으로 전범기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독일 전범을 다뤘던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후속 재판’(Subsequent Trials)에서 검사측은 독일 기업을 전범으로 기소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나치 동조 기업들이 처벌받았지만, 전범이 아니라 약탈이나 착취에 대한 법적 책임 때문이었다. 일본 전범을 다룬 ‘도쿄 재판’이나 식민지 이후 국제질서를 다룬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도 전범기업에 대한 규정은 없었다.

‘식민지 지배 불법성’을 인정한 제국주의 국가는 없다. 2차 세계대전에 승리한 연합국 영국과 프랑스, 미국도 식민지를 갖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던 1952년 당시에도 식민지나 식민령을 보유하고 있던 국가였다. 식민지 지배가 불법이면 영국과 프랑스는 불법을 저지르고 있으며, 식민지에 투자한 영국과 프랑스 기업의 이윤축적 행위 자체도 불법이 될 수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들이 해방되는 과정에서 민간인 자산에 대한 소유권은 온전히 보존된다. 식민지 지배가 합법적이었기에 식민지에 투자된 민간인 자산도 보호받았던 것이다. 이것이 전후 자유주의 세계질서였다.

1965년 한일외교 정상화 과정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을 요구한 ‘청구권 협정’에서 일본은 불법에 근거한 배상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윤리적 과오를 인정하는 ‘보상’임을 주장했다. 「경제협력 및 재산청구권 협정」은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 판단은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한국 협상단이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국제법적인 근거에 기초해서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8년 대법원 판결은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에 근거해 일본 전범기업이 한국 민간인 피해자들에 대해 ‘배상’ 책임이 있음을 적시했다. 일본은 국제법적으로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은 없었고, 전범기업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민간기업의 배상 책임을 부정하고 있다.

일본의 태도와 대조하기 위해 독일 민간기업이 개인 배상을 했다는 소식이 한국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이 또한 과장됐다. 독일 민간기업도 개인 배상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1990년대 이후 미국 유태인들이 법적 분쟁을 계속하자 태도를 번복한다. 그런데 조건이 붙었다. ‘강제수용’된 사실을 증명한 당사자에게만 개인당 440만원(1인당 평균 3천372유로, 2001년 환율 기준)이 지급됐다. 강제수용을 증명하지 못하면 제외됐다. 전쟁 중 민간기업의 무불 임금은 배상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의미다. 금액으로만 보자면 이 배상액은 상징적인 것에 불과하다. 독일 기업이라고 해서 무슨 대단한 도덕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2015년 위안부 관련 합의는 그동안 식민 지배와 관련해 한일 간 맺은 가장 진일보된 것이었다. 일본군 개입을 공식 합의에서 언급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합의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를 무로 돌려버린 것은 문재인 정부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강제징용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2018년 대법원 판결과 그 후속 조치로 일본 ‘전범기업’의 국내 자산 동결과 강제집행이 예정됐다. 일본은 이를 수용할 수 없는 ‘마지노선’임을 다양한 외교 채널을 통해 한국 정부에 알렸고, 문재인 정부는 그때서야 대법원 판결이 갖는 의미를 진지하게 고려한 듯하다. 그 결과 일본 기업의 한국 자산에 대한 강제집행을 암묵적으로 연기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찾았다. 이 과정에서 ‘문희상안’이 나왔고 이 문제에 대한 윤석렬 정부의 기본 방향은 문희상안과 큰 차이가 없다. 식민 지배 불법성은 학계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지만, 국가 간 관계에서 승인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일본이 여전히 강제징용에 대한 민간기업 책임을 부정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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