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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양산군수 권만의 마애비가 울산에 있다..
기획/특집

양산군수 권만의 마애비가 울산에 있다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3/03/28 14:59 수정 2023.03.28 14:59

이병길
지역사연구가
항일독립운동연구소장
통도사 무풍한송길 이름바위에는 1천980명 이상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중에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마애비(磨厓碑)’다. 마애비는 비를 만들어 일정한 장소로 옮겨 설치하는 일반 비석과 달리 기존 자연석을 깎아 비를 만든 것이다. 마애비 역시 일종의 송덕비(頌德碑)로 비석을 따로 세운 것이 아니라, 바위에 새긴 것이라는 형태의 차이만 있다.

통도사 이름바위에는 몇 개의 마애비가 있다. ‘군수 임제원 선정비(郡守任濟遠善政碑)’는 양산군수(1777~1778)를 지낸 임제원(1718~1764)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가선 이우백 영세불망비(嘉善李友栢永世不忘碑)’는 동래부 축성 11패장 이우백의 후손이 1830년에 새긴 것이다. ‘동래홍후희조영지거막비(東萊洪侯羲祖營紙祛瘼碑)’는 통도사 부역을 면제하는 데 도움을 준 동래부사 홍희조의 공납지 감면 사은비다. ‘군수이후사렴선정비(郡守李候師濂善政碑)’는 양산군수(1780~1784)를 지낸 이사렴의 공덕비인데, 누군가 공덕 시를 지웠지만 차마 그 자체를 훼손하지 못하고 그 옆에 일제강점기 울산수리조합장을 지낸 박종묵이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통도사 무풍한송길에 있는 양산군수 임제원 선정비.

조선 중기 이상정(李象靖, 1711~1781) 문집 『대산집(大山集)』 제2권의 「남유록 병서(南遊錄 幷序)」에 통도사에 와서 권만의 이름을 발견한 내용이 있다. 대산 이상정은 1754년(영조 30년) 연일 현감으로 있으면서 6월에 휴가를 받아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고, 9월에 일본외교관 차왜를 만나는 접위관으로 동래로 오면서 통도사에 9월 13일 도착했다.

“통도사(通度寺)에 들어갔는데, 동구(洞口)에 바위가 하나 우뚝 서 있었다. 높이는 세 길(三丈, 1m) 정도인데, 앞면엔 강좌(江左) 권장(權丈)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강좌옹(江左翁)’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참을 어루만지다 보니 나도 모르게 해 질 녘 인근에서 피리 소리가 들리는 듯한 감흥이 일어, 서로 절구를 지었다”

그때 지은 시가 <통도사 동구에서 강좌 권장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보고 감회가 일어(通度寺洞口見江左權丈題名有感)>이다.

맑은 시내 한 굽이는 산을 감아 흘러가고(淸溪一曲抱山迴)
솔 회나무 그늘 속엔 오솔길이 열렸구나(松檜陰陰小逕開)
말 멈춰 선 석양 녘에 드는 생각 무한하니(立馬夕陽無限意)
옛사람의 남은 자취 반은 이끼 덮였구나(故人遺迹半荒苔)


강좌는 양산군수를 지낸 권만(權萬, 1688~1749)의 호다. 필자는 지난 10여년간 통도사 이름바위를 찾아 그 이름을 분석해 『신편 통도사지(하)』에 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권만의 이름바위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양산군수 권만이 남긴 『강좌선생문집(江左先生文集)』 10권 부록에 <통도사 마애비(通度寺磨厓碑)>란 시가 있다.

지극한 정성이 능히 변화시킨다네(至誠能化)
곡진한 믿음이 있어서(有孚攣如)
봉산의 해악을 제거하여서(去封山害)
이 백성 살림을 안정시켰다네(奠斯民居)


이 시는 권만이 남긴 글이 아니라, 그의 사후에 양산군수 시절 업적을 기려 양산군민이 통도사 이름바위에 새긴 마애비로 추정된다. 이 마애비를 역시 찾고자 했지만, 최근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권만은 1747년(영조 23년) 늦은 나이 60세에 양산군수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마애비에 있듯이 봉산(封山)의 해악을 제거한 인물이다. 봉산은 주로 소나무 배양처가 대다수며, 봉산에서 공급되는 목재는 국방과 관련한 전선(戰船)이나 지방에서 거둔 세곡(稅穀)을 운반할 조운선(漕運船) 건조용으로 쓰였다.

18세기 영조 때 만든 『해동지도(海東地圖)』에 나타난 양산의 봉산. 서울 규장각.

18세기 『해동지도(海東地圖)』에 나타난 양산 영축산맥 봉산은 영축산 통도(通度)봉산, 상북면 외석 석장봉산(石莊封山), 하서면 원동 내포(內浦)봉산, 상북면 어곡(漁谷)봉산, 하서면 물금 화제탄(花濟炭)봉산이 그것이다. 맞은편 천성산 방향에는 대둔(大芚)봉산, 본법곡(本法谷)봉산이 있었다. 『해동지도(海東地圖)』와 『여지도(輿地圖)』(18세기 중기, 규장각 소장)에도 봉산이 표시돼 있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 폐단을 겪어야 했으며, 심지어 고을을 떠나는 군민도 많았다. 그러나 역대 군수들은 자신의 지위 보장에만 급급하고 사경(死境)에 빠진 민심을 돌보지 않았다.

양산군수 권만이 볼 때 양산이 경상남도에서 가장 피폐한 지역인 이유는 두 가지 문제 때문이었다. ‘수재(水災)’와 ‘봉산(封山)’이다. 1742년 대홍수로 산사태와 함께 제방이 무너져 성이 잠기고 관청이 무너지는 일도 있었다. 제방을 축조해도 홍수가 나면 다시 무너지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양산군 북쪽, 즉 통도사(通度寺) 이남(以南)과 북정(北亭) 이북(以北)만 홍수 피해가 없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봉산이 설치된 이후로 북면지역도 문제가 생겼다. 봉산 도벌(盜伐)과 방화(放火)에 따른 비용은 양산군민이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양산 상ㆍ하북면 주민은 봉산을 ‘반드시 죽는 땅(必死之地)’으로 인식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해 ‘사람 없는 지역(無人之境)’이 될 정도였다.

양산의 봉산은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봉산들이 모두 뼈만 있고 살이 없어 층암(바위)만 산지를 덮고 있을 뿐이니, 수목이 뿌리를 내릴 지역이 아니라서 쓸모 있는 나무는 얼마 없었다. 둘째, 봉산 설치 규정에 따르면 바다로부터 30리 이내인데 양산은 가까워도 50~60리였다. 또한, 내포산 이외 석장, 통도, 대둔봉산은 수로 운반이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셋째, 봉산의 피해로 양산군민 집(民戶)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었다. 부역과 세금으로 남자아이 낳는 것을 우환거리로 보는 지경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권만 군수는 “양산의 봉산은 유명무실해 도무지 군민에게 폐단이 될지언정 이익은 없다”는 <봉산 혁파 장계>를 올렸다.

그런데 그동안 수군절도사들은 무조건 금령만을 지켜왔을 뿐 이를 상청(上請)하는 것을 싫어하고, 봉산 혁파 장청(狀請)을 올리는 자를 논죄했다.

권만의 상소는 『강좌선생문집』에 당시 좌의정 조현명(趙顯命, 1690~1752)에게 보낸 「상조좌상(上趙左相)」로 봉산 혁파를 제청하는 내용의 긴 편지다. 조현명은 1730년 경상도 관찰사, 1748년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1749년에는 영돈녕부사 조현명(趙顯命)과 호조 참판 남태량(南泰良), 서장관 신위(申暐)와 함께 중국 청나라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간 적이 있다.

『영조실록』, 영조 24년(1748년) 9월 6일. 병조 판서 김상로의 진언 내용.

양산군수 권만의 상소는 1748년 9월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에 의해 영조에게 전달됐다. “양산군(梁山郡)은 전토(田土)가 협소한 까닭으로 거민(居民)들이 의뢰하고 있는 것은 단지 두 곳의 대평(大坪)뿐입니다. 그런데 그중 하나는 연전의 큰 홍수에 모래와 자갈 더미로 변해 버렸고, 또 하나는 수영(水營)에서 관장하는 대둔(大屯)ㆍ석장(石藏)ㆍ통도(通度) 등 세 개의 봉산(封山)이 잇달아 그 가운데로 뻗어 있어 그 진영(該營)의 죄상 조사(摘奸)가 잦습니다. 그리해 거기서 기르는 수목(樹木)이 불에 타거나 도벌(盜伐)을 당하면, 산 아래 사는 백성들의 형벌과 유배(刑配)가 잇달게 돼 일체 모두 떠나 흩어진 탓으로 옛날에는 큰 마을을 이뤘던 곳이 이제는 빈터만 남아 있게 됐습니다. 따라서 끝없이 넓은 큰 들판이 황폐하게 돼 잡초만 무성할 뿐이니, 실로 놀랍고 참담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봉산을 파기시키지 않는다면 양산읍(本邑)을 파기해야 할 상황입니다. 이는 양산군민(民邑)에 관계되는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앙달합니다”하니,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순문(詢問)해 도신(道臣, 경상도 관찰사)과 수신(帥臣, 병마절도사)으로 하여금 장문(狀聞)하게 했다.

그로부터 1개월 뒤인 1748년 10월 11일 봉산(封山) 파기가 결정됐다. 도신(道臣)이 폐단이 있다고 장문(狀聞)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도신인 경상도 관찰사가 바로 남태량이었다. 당시 봉산이 해제된 곳은 석장ㆍ통도ㆍ대둔봉산이고, 원동지역 내포봉산은 남았다. 1749년 2월에 일어난 내포봉산 산불에 대해 거짓으로 보고했다는 경상좌수사 이언섭(李彦燮)의 보고에 의해 권만은 체포됐다. 그해 8월 9일 권만은 파면되고, 11월 4일 사망했다.

권만은 통도사를 소가 엎드린 ‘와우형(臥牛形)’이라며 주변 마을 이름을 초산, 평산 등으로 고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후 구하 스님과 경봉 스님은 통도사 영축산 산세가 와우형이 아니라 용이 구슬을 머금고 날아오르는 듯한 형국인 비룡농주형(飛龍弄珠形)으로 수정했다.

권만의 이름바위와 통도사 마애비를 찾기 위한 노력에도 수년 동안 성과가 없었다. 그러다가 엄형섭 울산문헌연구소장의 금석문 번역에서 권만의 마애비 소재를 알고 찾아 나섰다. 2023년 3월 18일 울산 동구 동부동 마골산에 있는 울산테마식물수목원 입구에 권만의 마애비가 있었다. 수목원은 대단히 넓고 사시사철 볼거리와 휴식을 제공하며 어린아이들 산교육에 좋은 공간이다. 마침 필자가 찾은 시기에 수목원은 진달래가 만발했다.

현재 울산테마식물수목원 입구에 있는 남태량과 권만의 영세불망 마애비.

송시준 수목원장(1943년생)에 따르면 언양지역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라고 한다. 무게가 46t이고 230×370cm 정도 크기다. 바위를 옮기는 과정에서 울산 도심을 통과하지 못해 우회해 마골산 수목원으로 옮기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바위는 마애비 부분을 남기고 절반 정도 절단한 형태로 있었다. 왼쪽에는 남태랑 마애비, 중간에는 파손된 마애비, 오른쪽에는 권만의 마애비가 있고, 오른쪽 끝에는 이 마애비를 새로 새긴 양산 유생의 이름이 있었다.

왼쪽 남태량 영세불망 마애비 내용은 다음과 같다.

巡相南公泰良永世不忘
剛克其性 直溫其政 / 啓罷封松 活我民命

순상(巡相) 남태량(南泰良) 공 영세불망
그 성품은 강하고 굳세고
그 정사는 곧고도 온화하여
소나무 봉산의 고달픔을 알리어
우리 백성의 목숨을 살렸다네

중간 마애비는 심하게 훼손돼 있었다. 권만의 영세불망 마애비와 그것을 새로 새긴 내용은 다음과 같다.

郡守權公萬永世不忘
弊祛三封 攣如有孚 / 化洽一境 嗟乎未忘

乾隆十四年 己巳 十月 日

光緒元年乙亥四月 日 改刻
士林 鄭有珏 /有司 李在植 /監役 姜在欽 /禹錫奎

군수(郡守) 권만(權萬) 공 영세불망
삼봉산(三封)의 폐단을 없애고
믿음으로 보살피셨고
교화가 온 고을에 두루 퍼져
아, 잊지를 못하네.

건륭 14년(1749년) 기사 10월 일

광서 원년(1875년) 을해 4월 일 고쳐 새기다.
사림 정유각. 유사 이재식. 감역 강재흠 우석규


그동안 양산 봉산 혁파는 권만 양산군수의 업적으로만 알려졌었다. 하지만 이 마애비 발견으로 봉산의 폐단을 확인해준 남태량 경상도 관찰사의 역할이 분명해졌다. 이 두 사람은 소나무 벌목 금지로 인한 고초를 해결해줬기 때문에 양산군민이 그 공덕을 기리고 잊지 않기 위해 영세불망 마애비를 조성한 것이다.

양산군수 권만 영세불망 마애비와 새로 조성한 인물이 새겨진 바위 부분.

그런데 이 마애비는 1749년에 10월 조성했지만, 1875년 4월에 다시 조성했다. 중간 마애비가 권만의 것이라면 심하게 훼손된 상태다. 그의 사후에 어떤 일이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1875년 마애비를 양산 유생들이 다시 조성했다. 마애비 내용은 ‘통도사 마애비’ 내용과는 다르다. 새로 새긴 권만의 마애비 조성 시기는 광서 원년(1875년) 4월로 고종 12년이다. 고쳐 새긴 인물은 사림 정유각, 유사 이재식, 감역 강재흠ㆍ우석규이다. 이들 4명은 모두 이 시기 양산지역사에 등장한다.

양산군 관할이던 구포면은 지금의 낙동강변 부산 북구 금곡동ㆍ화명동ㆍ구포동ㆍ덕천동, 사상구 삼락동, 강서구 대저동까지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1869년(고종 6년) 구포면 대저동을 제외한 지역이 동래부로 편입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때 “차라리 남창의 물을 마실지언정 동래부의 물고기를 먹지 않으며, 차라리 양산 땅에 돌아가 죽을망정 동래부에 머물지 않겠다”는 구포 사람들 말도 있었다. 이에 양산군민은 당시 양산시 세금 수입 대부분을 차지했던 노른자위 구포면을 다시 양산으로 환속시키기 위한 1875년 양산군수(2회)와 경상도 관찰사(6회), 동래부사(2회), 의정부 영의정(2회), 비변사 당상(1회)에게 <구포복설상서(龜浦復設上書文)>를 12차례 올린다. 이 상서문 주동자들이 바로 이 마애비 조성 인물이다. 우석규는 상서문을 주동하며 10번이나 그 이름을 올렸다. 이재식은 7번, 강재흠과 정유각은 6번 상소에 동참했다. 당시 우석규와 강재흠은 하북면에 거주했다.

「구포복설비(1879년)」. 양산향교. <이유원 영세불망비> 뒷부분에 구포복설운동가 이름이 새겨져 있다.

상서문(上書文)을 올리는 등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좀처럼 성사되지 않았다. 양산 유림에서는 우석규(禹錫奎)ㆍ서상로(徐相魯)ㆍ이기수(李基洙) 세 사람을 대표로 뽑아 한양으로 보냈다. 세 사람이 양산군민 여론을 직접 임금에게 전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시골 선비가 임금을 만날 방법은 없었다. 결국, 남산봉수대에 올라 봉화를 올렸다. 봉홧불이 하늘을 밝히자 도성은 발칵 뒤집혔고, 의금부에 체포된 세 사람은 자신들이 봉화를 올릴 수밖에 없던 사연을 설명했고, 당시 영의정인 이유원이 그들을 가상히 여겨 봉화 사건을 면책하고 귀향하게 했다. 이를 계기로 1869년(고종 6년) 동래부에 편입됐던 구포지역은 1875년 다시 양산군에 귀속됐다. 권만의 마애비가 새로 조성된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양산군민은 1879년 당시 ‘영의정 이유원 영세불망비’를 양산 내원사 입구 국도변에 세웠다. 이 비석에 정유각ㆍ우석규의 이름이 있다. 이 비석은 현재 양산향교 앞에 옮겨져 있다.

양산지역에 있어야 할 마애비가 울산지역에 있게 된 사연이 있겠지만, 다행히 공사하는 과정에서 파괴되지 않고 온전히 울산지역에 완전한 형태로 보존돼 있음은 다행 중 다행이라 하겠다.

 

이병길
경남 안의 출생. 부산ㆍ울산ㆍ양산 삼산지역 지역사 연구. 현재 항일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저서로는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 <윤현진 평전>이 있으며, 오마이뉴스에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 <일제식민시대 언양ㆍ울산지역 소년운동사>를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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