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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57] 영원을 꿈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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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57] 영원을 꿈꾸는 연필, 연결된 추억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3/06/09 09:53 수정 2023.06.09 09:53
그래, 나는 연필이다/ 박지현

이기철
시인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이은 HBO 대작, ‘The Pacific’을 재미있게 본 적이 있다. 내용에 앞서 매우 인상 깊었던 장면은 오프닝 타이틀. 웅장하고 비장한 음악(한스 짐머가 맡았다)과 목탄(木炭)으로 그린 그림이 실사와 교차하며 나타난다. 마치 전장(戰場)에 포탄이 터져 파편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주제를 끌고 나가는 방법으로 매우 적절했다.

목탄을 연필이라고 말하면 안 되겠지만, 시청하던 당시 그냥 ‘연필’로 읽었다. 그런 이유가 있었다. 침 발라가며 갱지(更紙)에 꾹꾹 눌러쓰던 유년(幼年)이 따라왔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침 발라가며 쓴 연필’에 대해서 비로소 알게 됐다. 연필에 든 흑연이 매우 질 낮은 제품이어서 그랬다는 사실을. 선명을 위한 도구는 ‘침’이면 충분했다.

다큐멘터리 감독 박지현 씨가 쓴 ‘그래, 나는 연필이다’는 마치 ‘아이 엠 어 보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엇’에 관한 정체성을 확인한 사소하지만 확실한 감동이다. 연필이 곧 자신임을 자처하는 여러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등장인물들은 ‘연필’은 물질이 아니고 정신이며 역사, 더 나아가 삶임을 증명한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결코 간단히 정의할 수 없는 ‘원더풀 라이프’임을 재현한다.

‘그래, 나는 연필이다’ 책 표지.

공학자이면서도 ‘연필’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애정을 가진 헨리 페트로스키를 비롯(이 책 맨 앞에 등장한다), 연필 깎기 전문가 데이비드 리스(우리나라에 ‘연필 깎기의 정석’이라는 책이 출간된 바 있다), 연필심 조각가 달튼 게티, 연필로 직접 써서 만드는 잡지인 ‘맑은 연필’ 발행인 황성진 씨, 3D 시대에 연필로 그리기를 고집하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 안재훈 감독, 극사실주의 연필화가 디에고 코이 등 국내외 이른바 ‘연필 마니아’들이 줄줄이 소환된다.

아, 필자가 너무 좋아하는 한 사람, 동화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마르타 알레스도 등장하니 반가움은 증폭된다. 버려지는 연필 껍질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가다. ‘사자’, ‘발레하는 여자’, ‘투우사’ 등 작품은 익숙하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른바 ‘호기심 천국’이지만, 소소하게 드러나는 에피소드도 놓치면 안 된다. 이를테면 연필을 한시라도 몸에서 떼지 않았던 에디슨이라든가 ‘월든’으로만 기억하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연필회사를 운영하던 사람이었다는 사실. 그가 ‘시민 불복종’을 쓰던 때도 그 회사는 존재했다.

‘연필’ 하나로 이렇게 흥미를 일으키는 새삼스러움은 마지막에 우리를 연필심 고향 영국 보로데일 광산으로 인도한다. ‘흑연’(黑鉛)이 발견된 곳이다. 누가 발견했는가에 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 커피를 발견한 사람이 염소 목동이었다는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처럼 흑연도 ‘양치기 흑연 발견설’이 존재한다.

에티오피아 칼디라는 목동에 의해 처음 발견됐다는 커피는 염소들이 빨간 열매를 따 먹고 흥분해 날뛰는 장면을 목격, 자신도 먹어보니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해졌단다. 흑연도 그렇게 이야기가 펼쳐진다. 목동은 보로데일지역 언덕에서 태풍으로 쓰러진 나무 하나를 만난다. 근처에서 검은 물질을 발견, 이것으로 자기 양에 표식을 그려 넣었다는 것.

질 좋은 흑연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깃털 펜에 잉크를 묻혀 글을 썼다. 흑연 발견은 삼나무와 결합하면서 그 가치와 필요성은 대중화됐다. ‘심’과 ‘향’이 만났으니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닌가?

마르타 알테스 작품, ‘사자’.

이 책은 2001년 헨리 페트로스키가 쓴 ‘연필’을 읽은 작가가 다큐로 만들어 보자는 결심을 한 후 오랜 시간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완성한 필름 뒷이야기를 새롭게 묶었다. 기획안은 번번이 퇴짜를 맞았고 그때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어렵사리 완성했다. 2015년, 이 작업은 ‘연필, 세상을 다시 쓰다’라는 제목으로 전파를 탔다. (유튜브로 검색하면 볼 수 있다)

연필이란 말은 라틴어, ‘페니실리움’(penicillum)에서 유래를 찾는다. 이는 영어 ‘페니스’(penis)를 의미하는데(얼른 떠올랐을 ‘그것’ 아니고 ‘꼬리’라는 의미다.) 이것이 프랑스어 ‘핀셀’(pincel)로 변형되었다가 최종적으로 ‘펜슬’(pencil), 즉 연필로 불리게 됐다.

연필(鉛筆), 필기도구 중 하나. 사전에서는 ‘흑연과 점토의 혼합물을 구워 만든 가느다란 심을 속에 넣고, 겉은 나무로 둘러싸서 만든다’고 정의(定義)한다.

당신은 오늘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되려 하는가? 평범한 연필 하나에도 이리 많은 ‘히스토리’가 있다. 밑줄 치고 동그라미 그리는 인생에 심(芯) 혹은 단단한 심(心)을 준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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