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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60]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귀하고 귀하다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3/07/21 09:07 수정 2023.07.21 09:07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이윤엽

이기철
설명이 필요한 혹은 이론이 요구되는 예술 작품은 살짝 부담될 수 있다. 그냥 편하게 접하면서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는 일, 누구로부터 도움받지 않아도 찾아내는 메시지 발견은 기쁨으로 발전한다. 소위 ‘예술’을 대하는 자세는 지레 겁을 먹거나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손사래 칠 일이 아니다.

여러 장르 중 하나인 그림, 사실 그림 감상 핵심은 관심에서 시작된다. 다음 단계는 보는 일이다. 흔히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마음을 열게 하는 열쇠가 된다. 다음은 ‘사랑에 빠지는 일’이다. 여기까지 가야 상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판화 이야기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판화를 단순한 복사나 재 생산품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니다. 오리지널 작품이 여러 개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복수 예술’이다. 반드시 작가가 에디션 표시를 하는 이유다. 판화 종류로는 동판화, 석판화, 스크린 프린트, 목판화 등이 있다. 집중해서 살펴볼 작품은 목판화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표지.

이윤엽 이야기 판화 그림책,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우리 이웃들 삶을 깎고 새기고 그려 넣었다. 작품들은 거친듯해도 전혀 이물감이 없다. 흑백으로 전진하다가 컬러로 전환시키는 대비도 볼만하다. 내용은 동화로도 읽히고 동시로도 느껴진다. 마음이 환해지면서도 먹먹해지는 암전(暗轉)도 느끼게 된다.

평소 노동자, 농민, 저항하는 자 등 이들 삶과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작가는 자신도 막일 노동자로 생계를 이어간 이력이 있다. ‘노동 미술가’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타인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보듬음을 따뜻하면서도 세심하게 그려낸 작품은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1부, ‘신기한 일’에서는 한 가족 이야기를 먼저 꺼낸 후 동네 사람 삶, 자연에 대해 불편하지 않은 간섭과 물음, 종내(終乃)는 답을 찾는 과정이다. 이웃집 할머니와 나눈 대화를 보자.

‘아랫집 할머니는/ 밥 먹었어 할머니야// 길에서 만나/ ‘안녕하세요?’ 하면/ ‘밥 먹었어?’ 하시고// 대문 앞에서 만나/ 안녕하세요?’ 하면/ ‘밥 먹었어?’ 하시고// 밭에서 만나/ 안녕하세요?’ 하면/ ‘밥 먹었어?’ 하시고// 아침에도 저녁에도 깜깜한 밤에도/ ‘안녕하세요?’ 인사만 했다 하면/ ‘밥 먹었어? 하시니까// 우리 아랫집 할머니는/ 밥 먹었어 할머니야.’ <‘밥 먹었어 할머니’ 전부>

혼잣말처럼 웅얼거리는 문장은 주인공 어린이 ‘병희’를 통해 파꽃, 도라지꽃, 자두나무, 호박에 깔린 사람, 김 씨 아저씨, 콩밭, 씨감자, 엄마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밥 먹었어 할머니’ 삽화.

2부, ‘이런 꽃 저런 꽃’은 봄소식을 전하는 매화나무를 먼저 불러낸 후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 세숫대야에 뜬 달, 웃는 개, 은행나무, ‘까부리’라 불리는 강아지, 철쭉, 찬장새, 잠자는 뱀, 미안해 너구리야 등을 소개한다. 그런데 아니, ‘으아악 나무’는 또 뭐냐?

‘…… 들리지? 들었지? 윙윙거리는 소리 들었지?// 그건 말이야. 인간의 말로 해석하면 말이야/ ‘으아악’이야/ 힘들다는 거야. 사는 게 괴롭다는 거야/ 그래서 나무가 ‘으아악’하는 거야/ 사실 이 나무의 이름은 ‘으아악’이야// 우린 모두 사는 게 힘들 때가 있지/ 그럴 땐 으아악 나무를 가슴으로 꼭 끌어안고/ 으아악 나무처럼 소리쳐 봐/ 그러면 가슴속 슬픔이 나무 속으로 울리고/ 나뭇가지로 다 빨아들여서 하늘로 휙 날려 버릴 거야.’ <‘으아악 나무’ 부분>

3부, ‘기억하는 마음’에 도착하면 비로소 작가 ‘현발’(현실 발언)과 마주친다. 이 세상 부조리한 일, 억울한 일, 함께 살아가는 문제인 공존(共存) 의미를 깨닫게 한다.

노동자 김 씨 까만 얼굴, 우는 사람, 연탄 배달, 재활용센터에서 일하는 아줌마, 쉽게 잊어서는 안 되는 일, 밤에 일하러 가는 사람, 대추리 사람들 슬픔을 그린 황새울, 기타 만드는 회사 콜트콜텍 횡포, 농부 백남기, 85호 크레인, 다시 안고 싶다는, 말 안 해도 알만한 그때를 재현한다.

‘사람들이 슬퍼하면/ 저절로 슬퍼져/ 사람들이 엉엉 우는 걸 텔레비전에서 보면/ 저절로 눈물이 나와/ 모르는 사람이고/ 아주 멀리 있는 사람들인데도/ 사람들이 슬퍼하는 걸 보면/ 이상하게 저절로 슬퍼져/ 내가 이상한 거야? <‘이상하게도 저절로’ 전부>

‘뻔한 이야기’인데 뻔뻔하지 않고 슬프지 않음에도 괜히 눈물이 나는 참 이상한 판화 그림책이다.

‘으아악 나무’ 삽화.

이윤엽 작가는 그간 ‘나는 농부란다’, ‘놀아요 선생님’,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등 작품을 쓰기도 하고 그리기도 했다. 출간 도사만 해도 19권이 넘는다. 그중 어린이 추천 도서도 다수 들어있다.

판화 그림책,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는 기다림이 전제이지만 하염없이 기다리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설핏 보이기는 하지만 단단한 ‘다음’이 기다려지는 대목이다. 오늘, 희망을 멀어 보여도 마침내 당도할 환호(喚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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