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양산시민신문

이겸수 공 기린 '남강서원' 낙성..
행정

이겸수 공 기린 '남강서원' 낙성

홍성현 기자 redcastle@ysnews.co.kr 281호 입력 2009/05/19 14:31 수정 2009.05.19 02:36
고종 때 폐철됐다 138년 만에 복원

↑↑ 학성이씨 문중이 남강서원 낙성식을 앞두고 죽제 이겸수 공을 기리는 봉안식을 진행하고 있다.
ⓒ 양산시민신문
임란공신 죽제(竹齊) 이겸수(1555~1598) 공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이후 후학 양성과 사림 유생의 강학장소로 활용되다 고종 때 철폐됐던 남강서원(南岡書院)이 복원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학성이씨 문중 남강서원추진위원회(위원장 이삼걸)는 16일 주남동 장재터에 복원한 남강서원의 봉안식과 낙성식을 열었다. 많은 비가 내린 궂은 날씨였지만 이날 낙성식에는 오근섭 시장을 비롯한 지역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남강서원의 복원이 갖는 의미를 되짚었다.
 
추진위 이삼걸 위원장은 "새롭게 복원된 남강서원은 어느 특정인이나 단체를 위한 건축물이 아니라 100년 후, 1천년 후의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며 "남강서원은 죽제 공의 얼을 기리고 후학들의 산교육장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밝혔다.
 
성균관장이자 남강서원장을 맡은 최근덕 원장은 "선비들의 공론으로 건립된 서원의 필요성은 시대가 변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며 "흥망성쇠가 반복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지만 세상이 충효를 숭상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자손들이 숭조보본(崇祖報本)하는 정신을 버리지 않는다면 오늘 이후 남강서원이 양산지역의 수풍균속(樹風均俗)하는 중심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죽제 이겸수 공은 웅상면 주남에서 태어났으며, 문필(文筆)과 치경(治經)에 탁월했고, 38세에 임진왜란을 만나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사명대사와 함께 일본 장수들과 외교 교섭에 큰 공을 세웠다. 이후 42세에 기장현감, 44세에 정주판관으로 부임했고, 사후 통훈대부로 추증됐다.
 
남강서원은 정조 7년인 1783년 죽제 선생을 기리기 위해 남강사로 창건됐으며, 고종(1868년) 때 남강서원으로 승호돼 후학 양성과 사림 유생들의 강학 논경장소로 활용됐다. 하지만 고종 신미년(1871년) 때 폐철(廢徹)됐다.
 
학성이씨 문중은 2004년 남강서원을 복원하기로 하고, 이듬해 주남문회 정기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복원을 의결함에 따라 2008년 추진위를 구성하고 2008년 1월 첫 삽을 뜬 뒤 지난 16일 낙성식을 열었다. 1천649㎡부지에 사당과 강당, 내ㆍ외삼문 등이 들어서 있다.

저작권자 © 양산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