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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창원의 ‘고향의 봄’ 축제 유감..
오피니언

창원의 ‘고향의 봄’ 축제 유감

박성진 기자 park55@ysnews.co.kr 373호 입력 2011/03/29 10:46 수정 2011.03.29 10:37



 
ⓒ 양산시민신문 
훌륭한 선조 선양사업 미흡해
시민 정신문화 근간 흔들려
충열의인 고증과 연구 거쳐
자긍심 높이는 계기 삼아야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이달 말부터 다음달 24일까지 창원시에서는 ‘고향의 봄’ 축제가 열린다. 고향의봄기념사업회와 창원예총, 창원MBC, 시립예술단 등 여러 단체가 다양한 행사와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아리랑과 함께 국민동요로 자리잡은 ‘고향의 봄’은 아동문학가 동원 이원수 선생이 열 네 살 때인 1926년 '어린이' 4월호에 실었던 작품이다.

창원에서의 ‘고향의 봄’ 축제 소식은 우리로서는 우울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 동원 이원수 선생은 1912년 양산 북정에서 태어났다. 신라 고분군 아래 산기슭의 생가터에는 한 그루 복숭아나무가 옛 기억을 되살려준다. 1980년대 중반 부산의 한 원로문인의 입을 통해 이원수 선생이 어린 시절을 양산에서 보냈다고 알려지면서 지역에서는 때아닌 ‘고향의 봄’ 바람이 불었다. 당시 양산군은 춘추공원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삼조의열비 광장에 ‘고향의 봄’ 시비(詩碑)를 세웠다.

2000년대 이후에는 민선 시장이 나서 이원수 선생 생가복원사업 추진이 거론되기도 했다. 하지만 생가터의 소유자와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사업이 주춤거릴 무렵 느닷없이 이원수 선생의 친일행적이 거론되면서 흐지부지됐다. 그 후에도 이원수 선생 개인을 부각하지 않고 국민동요인 ‘고향의 봄’과 관련한 테마공원이 건립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추진이 재개되는가 했지만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던 중 또다시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생전의 이원수 선생 본인이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고향의 봄’ 노랫말이 나온 배경은 창원 소답동이라고 밝힌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그는 이에 더해서 양산에서는 태어난 지 1년 만에 떠나왔기 때문에 아무런 기억도 없다고 덧붙임으로써 북정의 복숭아꽃은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양산이 낳은 위대한 선조들 가운데 신라 때 충신 박제상 공의 추모사업과 정신문화운동은 이미 울산에 뺏긴 상태다. 선영을 모신 효충사 주변의 ‘담장이 무너지고 방초만 무성하게’ 방치되고 있는 동안 울주군문화원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박제상 기념사업이 추진됐다. 그들은 우리 땅에서 태어나 우리 고을의 태수로 있을 때 왕명에 의거 일본국에 건너가 볼모로 잡힌 왕자를 구하고 자신은 처형 당한 충신 박제상 공을 ‘울산의 충의인물’로 재구성했다. 울주군 두동면에 있는 치산서원 옆에 수십억원을 들여 박제상기념관을 지었다. 그동안 뒷짐지고 있었던 우리는 빼앗겨도 할 말이 없다.

최근 몇 년 동안 문화계에서는 괄목할 사업을 몇 가지 추진하였다. 자연인의 모임과 향토사연구회를 중심으로 ‘양산항일독립운동사’가 집대성되었고, 항일독립운동기념탑도 건립되었다. 지난해는 삼조의열과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희생자를 한데 모으는 충렬사 건립공사가 착수됐다.

문화원은 최근 정연주 원장 취임 이후 흩어져 있던 문화단체들을 문화원 산하로 일원화해 체계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향토사연구회와 관설당서예협회가 한 지붕 아래에 들어와 둥지를 틀었다. 양산학춤의 명인 학산 김덕명 선생도 노구를 이끌고 문화교실의 스승으로 후학 지도에 나섰다. 지난해 취임한 나동연 시장은 평범한 소모성 축제로 전락한 ‘삽량문화축전’을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소신을 밝힌 바 있다.

산업의 발달과 물질의 풍요로 대변되는 도시발전의 틀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지역 문화계에서 역사적으로 이름을 알린 선조의 선양사업을 통해 시민사회의 자긍심을 제고할 정신문화운동에 대해 고민하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아직도 우리가 제대로 찾아내지 못해 사장된 선조들의 면면은 다른 고장에 비해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신라 때 거문고의 명수로 잘 알려진 백결선생은 박제상의 아들이며, 조선 초기 반란으로 몰린 이징옥 장군 등 삼장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고려 때 양주방어사로 왜적을 물리친 김원현이나, 임진왜란 중 동래성전투에 참가해 순절한 조영규 군수는 박제상과 함께 삼조의열로 추앙받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상해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윤현진 선생을 비롯해 많은 선조들이 항일투쟁에 나서 목숨을 잃거나 옥고를 치렀다.

후손들의 책임은 이런 선조들의 공과와 민족혼에 대해 학술적으로 연구하고 재조명하는 일도 포함될 수 있다. 존재가 불확실한 신화적 인물이나 남의 땅 사람도 끌어다가 충렬의사로 숭앙하는 마당에 제 땅에서 난 선조에 대한 의인화(義人化)를 주저할 이유는 없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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