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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골목상권의 강소업체
“좋은 과일 찾기 위해 발품 파는 만큼 인정받죠”

장정욱 기자 cju@ysnews.co.kr 입력 2013/04/16 11:25 수정 2013.04.16 11:25
양산시 중부동 남부시장 ‘과일나라’

남부시장 15년 과일장사 정경효 씨

“단골 신뢰만큼은 놓치지 말아야”




20년 전 정경효(52) 씨는 아동복 전문점을 운영했다. 동대문, 남대문 등 시장에서 떼어 온 옷들을 팔아 꽤 괜찮은 수입을 올렸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이른바 ‘시장표’로 불리던 ‘브랜드’ 없는 옷들을 부모들은 아이에게 더이상 입히려 하지 않았다. 대형 기업에서 생산한 ‘브랜드’ 제품이 속속 문을 열었고, 정 씨의 사업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시대가 변하면서 소비 형태가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1997년 터진 IMF 사태는 결국 정 씨 가게를 문 닫게 했다.

정 씨는 아동복 가게를 접고 남부시장 한 구석에서 과일 장사를 시작했다. ‘과일나라’라는 간판을 걸고 재기에 도전했다. 초기 성과는 나쁘지 않았다. 정 씨는 맛 좋은 과일만 확보하면 충분히 소비자들의 발길을 이끌 수 있다고 확신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정 씨가 산지에서 직접 맛보고 가져온 과일들은 손님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덕분에 장사는 성장세를 보였다. 4년, 5년이 지나면서 단골도 많이 늘어났다. 그런데 2004년 중부동에 대형 마트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다시 한 번 달라졌다. 서서히 손님 발길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장을 보러 오는 사람들 가운데 젊은 손님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차이가 나죠. 마트가 들어서기 전에 시장에 사람이 많았어요. 주문전화도 많았고요. 시장 자체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저절로 수익이 발생했죠. 그런데 마트가 생기면서 많이 달라졌어요. 아무래도 마트가 편하잖아요. 시장보다 동선도 짧고 시설도 잘 돼 있고. 젊은 사람들은 마트로 가게 마련인거죠”

상승세를 타던 과일장사도 그때부터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정 씨의 표현대로라면 ‘밥은 먹고 살지만 저축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단골 고객 덕분에 최소한의 수익은 발생하고 있지만 돈을 모으는 것은 기대하기 힘든 현실인 것이다.

최근 전통시장을 살려야 한다는 여론 탓에 대형마트에서 반강제적 ‘의무휴업’을 실시하고는 있지만 이 역시 큰 효과가 없다고 말한다. 정 씨는 “우리 지역에서도 마트가 한 달에 두 번씩 쉬기 시작한 게 몇 달 전부터지만 솔직히 그 효과는 전혀 모르겠다”며 “아예 마트가 없다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단순 휴업보다는 상생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5일장이 전통시장 망치고 있다”


정 씨는 5일장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흔히 ‘장날’하면 전통시장의 분주한 모습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상인들 입장에서도 ‘한 몫 잡는 날’이 될 게 뻔해 보인다. 하지만 정 씨의 설명은 이러한 일반적 생각을 깨고 있다.
정 씨는 “5일장이 서는 날이면 기존 상인들보다 외지에서 들어오는 상인들이 시장을 점거해 버리기 때문에 기존 상인들에 이득이 될 게 없다”고 설명했다. 오히려 각종 좌판으로 시장이 복잡해지기만 하고 시장을 찾는 고객들에게도 불편을 줄 뿐이라고 말했다.

“예전에는 시장 규모가 작고 품목이 다양하지 못하다 보니 5일장이 열려야만 소비자가 다양한 물건을 구매할 수 있었죠. 그래서 다들 장날을 기다리는 거고요. 하지만 이제 아니잖아요. 이미 전통시장도 상설시장으로 없는 물건이 없는 곳이 됐는데…. 이제 5일장은 오히려 시장을 위축시키고 있어요”

정 씨는 5일장이 열리기 전날과 다음날은 시장을 찾는 손님들의 발걸음이 눈에 띠게 줄어든다고 말한다. 정 씨의 설명대로라면 보통 한 달에 6번의 장이 서니까 최소 12일은 손님이 평소보다 오히려 줄어든다는 계산이다.

5일장에 대형마트까지 장사 환경은 정 씨를 힘들게 한다. 하지만 장사치가 주변 환경 탓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법. 정 씨는 골목상권으로 살아남는, 버티는 방법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단골에게 주는 신뢰’를 꼽았다.

“단골에게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은 마트와의 경쟁에서 장점이 되기도 하고요. 마트 과일은 사실 시장 과일보다 맛이 떨어집니다. (마트가) 가격 경쟁에서 우위에 서려다 보니 도매상과 납품업자들에게 세일 가격에 맞추라고 강요하죠. 결국 도매상 입장에서는 세일가격에 납품하려다 보니 조금 질 낮은 과일들을 공급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면 안 돼요. 마트보다 설령 조금 비싼 과일을 내놓더라도 우선 맛이 좋아야 합니다. 그래서 단골들이 우리를 신뢰하게 만들어야죠. 시장은 고객에게 신뢰를 못주면 버틸 수 없습니다”


“남은 경쟁력은 소비자 신뢰”


소비자들은 이러한 정 씨를 신뢰한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정 씨가 공급하는 과일을 신뢰하는 것이다. 정 씨 설명에 따르면 일부 고객들은 포장 박스에 표기된 생산자 이름을 기억하고 꼭 그 상품을 다시 구매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생산자 이름을 대면서 물건은 보지도 않을 정도라고. 또 마트에서 차량 가득 공산품을 구입한 고객도 과일 만큼은 꼭 정 씨 가게에서 사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소비자의 입맛이 생산자를 신뢰하게 만들고, 공급하는 사람은 이러한 신뢰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게 정 씨의 장사 철학이다.

“사실 마트와 가격 싸움에서 이기긴 힘듭니다. 대신 과일이라는 품목은 금액 보다 맛이 더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맛 좋은 과일을 찾기 위해 발품을 팔아야 합니다. 저는 산지에서 직접 과일을 구매하기도 하고 믿을만한 중간 도매상을 거치기도 합니다. 때로는 경매시장에 직접 나가보기도 하고요. 좋은 제품을 구해야 고객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거든요. 이제 우리 전통시장은 단골들의 신뢰를 잃어버리면 도저히 버텨낼 수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해요”

평소에는 시설 좋고 편리한 대형 마트와, 장날에는 외부에서 유입된 장사꾼들과 경쟁을 벌여야 하는 정 씨. 경기는 여전히 바닥이고 시장을 찾는 손님의 발길은 줄어들고 있지만 맛에 대한 단골들의 신뢰 하나를 무기로 오늘도 작은 가게 구석에서 그는 ‘맛 좋은 과일’을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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