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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창간기획- 우산 윤현진] 조국독립 꿈꾸며 불꽃 같은 삶 ..
기획/특집

[창간기획- 우산 윤현진] 조국독립 꿈꾸며 불꽃 같은 삶 살았던 아름다운 청년

홍성현 기자 redcastle@ysnews.co.kr 입력 2015/09/08 10:54 수정 2016.06.21 10:54
부유한 관료 집안에서 출생, 임시정부 초대 재무위원장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헌신, 정부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윤현진(尹顯振) 선생은 양산사람이다. 1892년 9월 16일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158번지 내전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호는 우산(右山)이다.


선생은 아버지 윤필은과 어머니 김안이의 2남 4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필은은 현재 부산시장격인 동래부윤(東萊府尹)과 경상우도 관찰사, 동래부 감리서 등을 지냈고, 할아버지인 윤홍석도 동래부사와 사천군수를 지낸 구한말 관료 집안이었다.


선생은 어린 시절 성품이 후덕하고 총명했다고 한다. 고향인 소토리에 있는 광주 안씨 문중사당인 만성제서숙((晩惺齋書塾)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이때 하나를 보면 열을 깨닫는 지혜를 가져 선생의 스승과 마을 사람은 소토리 뒷산인 천성산의 정기를 타고난 신동이라 칭찬했다고 한다. 10세 때 이미 경서에 능통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15세이던 1907년 숙부 윤상은이 부산에 세운 구포 구명학교를 제1회로 졸업했다.


선생은 17세 되던 1909년 중국 남경과 북경, 상해 등을 돌아보면서 외국 여러 인물을 만나 국제정세를 익혔고, 특히 북경에서 청나라 내분을 보면서 새 시대에 적응하려면 그 시대에 맞는 식견과 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 우산 윤현진 선생
의춘의숙 설립해 고향에서 후학 양성


1912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간 선생은 일본 명치대학(明治大學) 법과에 입학해 조선유학생학우회와 조선광복동맹결사단을 조직해 총무로 활동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을 펼쳤다. 조선유학생학우회는 1914년 4월부터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했는데, 선생은 학지광 5호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선생은 1915년 일본에서 김철수와 비밀결사를 조직했고, 1916년 초에도 김철수ㆍ정노식ㆍ장덕수를 포함해 중국인들과 함께 신동아동맹을 결성했다. 그 뒤 귀국해 안희제와 함께 백산무역, 구포은행 등에 관여하는 한편, 대동청년단에 가입하면서 많은 동지와 같이 활동했다.


선생은 또 일본인 상권에 대항하기 위해 의춘양행(宜春洋行)을 설립ㆍ운영했는데, 일본상품을 배척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근대적 회사이자 우리나라 최초 국민소비조합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생은 학교를 졸업한 뒤 일제가 갖은 수단에 진력과 방법으로 매수하려고 했지만 냉철하게 거절하고 귀국해 1917년 고향인 양산에 의춘의숙(宜春義塾)을 설립했다. 의춘의숙은 청소년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하고, 항일독립정신을 배양하는 후진양성 기관이었다. 의춘(宜春)은 양산의 옛 지명이다.


이후 선생은 1919년 3월 26일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망명했다. 선생이 중국 망명길에 오른 것은 1919년 발생한 3.1 만세운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선생은 당시 경남은행 마산지점장이었는데, 마산 혹은 양산에서 만세운동을 했고, 일제 탄압으로 이어져 중국으로 망명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 임시정부 국장으로 치러진 윤현진 선생 장례. 안창호, 김구, 신익희, 여운형, 김철, 최창식, 손정도 등이 선생의 장례에 참석해 애도했다.
임시정부 핵심인물로 재정 도맡아


1919년 4월 선생은 울산의 민족주의자 김홍조와 함께 상해에 모습을 드러낸다. 안창호, 이동휘, 김구, 김규식, 여운형, 신익희, 이동녕 등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 핵심인물로 참가했다.


선생의 활동은 국사일지(國事日誌)에 자세히 나타난다.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3일 <임시의정원법>을 제정하고 조선 8도와 해외 3지역을 포함한 11개 지방의원을 선출했다. 그때 선생은 김창숙, 유경환, 김정묵, 백남규, 김갑 등과 함께 경상도의원으로 선출됐다.


임시정부는 또 부서별 위원제를 채택했는데, 선생은 신익희 등과 함께 내무위원으로 선출됐다. 그해 7월 제2회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상임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선생은 현재의 기획재정부 장관에 해당하는 재무위원장과 외무위원회 이사로 선임됐다.


8월에는 국민법령으로 임시정부의 부서를 위원제에서 차장제로 변경했는데, 선생은 차장으로 임명돼 1921년 3월 22일까지 재임했다. 선생이 재무차장을 맡게 된 것은 선생의 자금조달 능력을 높이 평가한 안창호의 계속된 설득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국사일지에는 선생이 임시정부 재정 확보를 위해 노력한 모습이 기록돼 있다. 회사를 설립해 주식회사 기금을 확보하고, 회사를 운영해 자금을 조달하자는 구상을 제안한 내용이다.


선생의 임시정부 자금 조달은 그의 형인 윤현태와 관련이 깊다. 윤현태는 백산무역 설립에도 깊이 관여했고, 1919년에는 양산지역 지주들과 함께 일금상회를 경영했다.


1920년 초에는 양산에서 의춘양행을 운영했다. 윤현태의 적극적인 회사활동은 선생의 조금조달에 큰 도움이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선생은 김구, 김순애, 김철, 손정도 등과 함께 상해에서 의용단을 조직했다. 당시 의용단은 국내 조직을 만들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이후 전국 조직으로 확산됐다.


↑↑ 1959년 양산군민 성금으로 춘추공원에 세운 윤현진 선생 추모비
30세 꽃다운 나이에 안타까운 요절


선생은 구국의 일념으로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병을 얻어 광복의 한을 풀지 못한 채 1921년 9월 17일(음 8월 16일) 이역만리 상해에서 순국했다. 향년 30세로 너무나 아까운 나이였다. 선생의 비보를 접한 국내ㆍ외 수많은 애국지사는 그의 서거를 애통해 했다고 한다.


일제의 <조일신문>에서도 ‘형극 배일수완가 윤현진의 死’(일본에 대항하는 수완가 윤현진의 죽음)란 제목으로 보도하면서, 그의 사망은 임시정부의 폐망이라고 논평하며 대서특필했다.


그만큼 일본에서도 무서운 존재였다는 것이다. 선생의 장례는 임시정부 국장으로 치러졌고, 임시정부의 안창호, 김구, 여운형 등이 참석해 애도했다. 유해는 상해 정안사 외인묘지(현 만국공묘)에 안장됐다.


선생의 형인 윤현태는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상해 정안사에 있는 윤현진 묘소를 찾아 그곳에 ‘윤현진 묻음’이란 비석을 세웠다. 선생은 “독립하지 않으면 나의 유골은 고국산천에 묻지 말라”, “독립하지 않으면 나의 자녀를 혼가시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1959년 양산의 애향단체인 춘추계가 중심이 돼 춘추공원에 양산군민 일동의 이름으로 성금을 모아 추모비를 세웠고,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후 광복 50주년인 1995년 6월 23일 정부는 선생의 유해를 봉환해 대전국립묘지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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