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호자원 성용근(39) 대표는 지난 2일 서창동주민센터에 지역 청소년을 위한 정기 후원금을 전달했다. 그는 7년 전부터 지역사회 환원을 아끼지 않던 선친 故 성용수 씨 뜻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
이제는 이렇게 누군가를 도울 만큼 재호자원이 자리 잡았지만 수년 전만 해도 집안이 그리 넉넉지 못했다. 1998년 우리나라를 강타했던 IMF 경제위기로 가장인 선친이 직장을 나와야 했던 것이다.
“1998년 군대를 제대했어요. 그 찰나에 아버지는 IMF로 직장을 나오셨죠. 당시 아버지는 작은 폐지사업을 받아 나왔어요. 20대 초반이었던 저는 먹고 살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일을 시작했죠. 지게차와 짐차 하나만으로 이곳저곳을 다니며 폐지, 고철 등 폐자재를 모았어요. 신문사에 있는 폐신문을 받아가기도 했죠”
이후 두 사람은 힘을 모아 2004년 ‘재호상사’라는 이름으로 울산에 폐지압축공장을 냈다. 양산에서 출ㆍ퇴근하며 아무런 연고도 없는 울산에서 일해야 했다. 두 사람은 10년 뒤 고향인 양산에 회사를 세우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공장을 지어 놓고도 종이가 들어오지 않아 몇 달을 손 놓고 있기도 했다. 공장운영이 처음부터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어렵게 세운 공장 수익으로 후원해
학생 10명 선정, 3년간 지원 예정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직접 다니며 우리 공장을 소개했어요. 시간이 흐르고 조금씩 저희와 거래하겠다는 곳이 생겼죠. 그렇게 재호상사로 울산에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일한 지 6년이 지난 2009년 어느 날이었어요. 아버지는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 끼니 걱정으로 하루하루 어렵게 살아가는 이웃이 많다’며 걱정하셨죠. 그들처럼 어려운 시절을 넘겨왔기에 누구보다 힘든 사람을 이해한 우리 가족이었어요. 어머니나 저도 아버지 의견에 동의했고, 그때부터 기부를 시작했죠”↑↑ 2010년 8월 24일 웅상출장소 기부할 당시 故 성영수ㆍ성용근 부자. ⓒ
시작은 500만원이었다. 성 대표는 선친과 서창동주민센터를 방문해 첫 기부금을 전달했다. 이후 두 부자는 명절마다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을 주는 것이 베푸는 것이라는 마음으로 조금씩 이웃을 도왔다. 특히 가정형편 탓에 학업에 어려움이 있는 청소년 지원에 집중했다. 성 대표 선친이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나 어려운 형편에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사람이 부지런히 일하고 어려운 이웃도 챙긴 덕분인지 딱 10년 만인 2014년 ‘재호자원’이라는 이름으로 양산에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이 고향에 돌아온 지 1년, 성 대표의 선친은 췌장암 판정을 받아 수술하게 됐다. 통원치료를 하던 중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져 병원에 갔고, 4시간 만에 명을 달리했다. 2015년 이맘때 힘들게 명절을 보낼 이웃을 생각하던 키다리 아저씨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그 뜻은 남아있어요. 어려운 이들을 생각하는 아버지 마음을 생각하며 계속 기부해왔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해가 바뀌면서 새로운 결정을 내렸어요. 예전에는 해마다 다른 학생을 대상으로 지원해왔는데 올해부터는 학생 10명을 정해 3년 동안 지원하기로 한 거죠. 같은 학생에게 계속해서 지원하면 더 도움이 되고, 기억에도 남을 것으로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에요”
키다리 아저씨는 세상을 떠났지만 성 대표가 남아 그 자리를 지켜가고 있다. 알아주는 사람 없어도 이웃의 쌀이 떨어지지 않길 기도하며 보내온 후원금. 성 대표는 후원받은 사람이 그 도움을 기억해 훗날 또 다른 누군가를 돕길 바란다고 했다. 한 번 쓰고 버린 자원이 또 다른 자원으로 탄생하듯 말이다.
“학생들이 저희 도움을 받아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적은 돈일 수도 있지만 어느 날 문득 떠오르기만 해도 좋죠. 능력이 되는 동안 계속 돕고 싶어요. 언제든 기회가 되면 학생들과 만나 밥 한 끼 하며 이야기도 나누고 싶네요. 아이들 마음까지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아직 먼 미래긴 하지만 제 아이도 저를 따라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살길 바라요. 저희 가족의 작은 후원이 또 다른 후원을 낳고 양산의 어려운 이웃 모두가 부족함 없이 살 수 있길 기대해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