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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정욱 기자 cju@ysnews.co.kr | ||
ⓒ 양산시민신문 |
1993년 중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 해가 바뀌기 전이었으니 당시 내 나이 만 15세.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라는 걸 했다. 음료를 만드는 대기업이었는데 생산한 제품을 컨테이너에 싣는 게 내 일이었다.
음료수 상자를 컨테이너 안에 7단으로 쌓아 올리는데 3명이 1개 조로 움직였다. 처음에는 힘도, 요령도 없어 맨 윗줄까지 제대로 쌓지도 못했다. 오히려 좁은 컨테이너 안에서 나는 거치적거리는 존재였다. 그래도 같이 일했던 형들(지금 생각하면 완전 아저씨뻘이었지만 그들은 꼭 형이라 불리길 원했다)은 핀잔 한 번 없이 내 몫까지 도맡아 일했다. 물론 나도 일주일쯤 지나니 요령이란 게 생겨 ‘밥값’은 하는 수준이 됐다.
아침 8시 30분 출근해 저녁 6시 30분까지 기본으로 일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주일에 적어도 세 번 이상 잔업을 했다. 잔업을 하는 날은 10시 무렵까지 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꼬박 한 달을 일했다. 당시는 주5일 근무가 없던 때라 보통 한 달에 25일 이상 일했다. 그렇게 이틀에 한 번꼴로 잔업까지 하며 받은 월급이 64만원 남짓 된 거로 기억한다.
이후 고등학교와 대학을 지나 회사에 취직하기 전까지 방학, 휴학 때 아르바이트를 빼먹어본 적 없다. 매번 그렇게 일하면서도 그런 내가 특별히 고생한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한겨울 동이 트기도 전에 공사현장에 출근해 벽돌을 나를 때도, 한여름 달궈진 아스팔트 위에서 가스 불을 옆에 두고 차선을 그을 때도 마찬가지다. 나처럼 일하는 청춘들이 대한민국 구석구석에 무수히 많다는 걸 알기 때문에 고생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세월은 2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런 청춘들은 여전한 모습이다. 올해 18세 조카들도 고등학생이 되면서 주말, 때로는 주중에도 고깃집에서 숯불을 나르고 손님이 먹고 떠난 상을 치우고 있다. 지극히 평범한 우리 서민 가정 속 아이들 모습 그대로다. 이 아이들은 돈 많은 부모 못 만난 걸 원망하지 않고 때로는 취객 술주정까지 감당하며 세상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으며 자라고 있다. 지금도 많은 ‘흙수저’들은 그렇게 세상과 마주하고 있다.
스물한 살이라던가? 뭐 정확히 알려진 게 별로 없어서 나이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20대 초반, 대통령도 발아래 둔 부모 밑에서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난 정 아무개. 수십 억원짜리 말 한 마리로 실력과 관계없이 대학까지 간 그녀가 최근 세상의 ‘풍파’와 마주하고 있다. 자신과 부모가 자초한 풍파인데, 그의 부모를 변호하는 이는 이 친구가 ‘풍파를 견딜 수 없는 나이’라며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길 거부한다.
사실 정아무개는 풍파를 견딜 수 없는 친구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 이유가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나 단 한 번도 어려움이란 걸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지, 나이 탓은 아니다. 아직 수많은 10대 소년, 소녀들이 남이 먹다 남긴 음식을 치우고, 술 취한 손님 시중을 들며 세상을 배워 가는 현실이다. 스무 살 넘은 성인을 ‘풍파를 견딜 수 없는 나이’라 하는 건 이들이 흘린 땀을 욕되게 하는 말이다.
‘비비디 바비디부’. 원하는 대로 이뤄진다는 주문. 마술 지팡이 못지않은 부모덕에 손에 물 한방을 묻히지 않고 자랐을 그의 ‘풍파’를 TV로 지켜보고 있으려니 오늘날 대한민국 수많은 나의 조카들에게 왠지 미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