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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기자의 눈]군불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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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군불 냄새

장정욱 기자 cju@ysnews.co.kr 입력 2017/01/10 10:31 수정 2017.01.10 10:31









ⓒ 양산시민신문
어렸을 적 내가 살던 동네는 오후 4시 무렵이면 온 동네를 뒤덮는 냄새가 있었다. 집집마다 굴뚝에 흰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풍기는 매캐한 냄새였는데, 동네 어귀에서 뛰어놀던 우리들에겐 하나의 신호이기도 했다. ‘아, 조금 있으면 밥 먹을 때가 됐구나’하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려주지 않아도 아이들 모두가 알고 있는 바로 그 냄새. ‘군불 냄새’다.


‘군불’은 아궁이에 지피는 불을 말한다. 밥을 짓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방안 온돌을 데우기 위해 때는 불이다. 하지만 군불을 피우는 가마솥 안에는 언제나 밥, 고구마, 감자, 옥수수 등 먹을 것들이 함께 익어간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군불 냄새는 곧 밥 짓는 냄새였다.


집집마다 군불을 피우기 시작하면 아이들도 슬슬 하던 놀이를 마무리했다. 발갛게 얼어붙은 얼굴에는 아직 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곧 있으면 ‘정욱아 밥 먹자’라는 어머니 외침이 예상되는 만큼 오늘 놀이는 그쯤에서 정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갈 차비를 하다보면 어느새 해도 서산을 넘어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간 아이들은 무표정한 얼굴의 아버지 옆에 앉아 어머니가 들고 오시는 밥상을 기다렸다. 간혹 이웃 마을까지 ‘원정’가서 놀다 집으로 돌아갈 때를 놓친 아이들도 친구 집에 눌러 앉아 밥 먹을 차비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염치없는 짓일지도 몰라도 당시에는 마치 자기 집인 듯 자연스러웠다.


군불 냄새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냄새이자 내일을 기약하는 냄새였다. 특히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알려주는 냄새였다. 매캐하지만 그 속에 사람 온기를 품은 ‘향기’였다. 내 새끼, 남의 새끼 구분 않고 밥 먹이고, 우리 집 남의 집 상관 않고 놀던, 사촌 보다 가까운 이웃이 곁에 있음을 알려주던 군불이었다.
대학을 갈 무렵부터였을까? 어느새 우리 동네에도 군불 냄새가 사라졌다. 한겨울 칼바람에도 동네를 신나게 뛰놀던 아이들 모습도 사라졌고, ‘개똥아 밥먹자’라며 목청 높이던 어머니들의 모습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한때는 일상이었던 것들이 이제 추억이 돼 버렸다.


군불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진 최근 한 캠핑장에서 그 냄새를 다시 맡을 수 있었다. 물론 어린 시절 군불과는 전혀 달랐지만 매캐한 냄새가 옛 추억을 되뇌게 한 건 분명하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가 그랬듯, 추운 날씨에도 황산문화체육공원 국민여가캠핑장에는 ‘사람’이 있었다. 엄마, 아빠가 밥을 짓는 동안 아이들은 잔디밭에서 뛰고 굴렀다. 아이들은 처음 본 사이에도 어느새 친구가 돼 장난을 주고받았다. 넉살 좋게 남의 집 밥상에 앉아 밥까지 얻어먹는 아이들은 없었지만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진다는 게 어떤 모습인지는 보여줬다.


과거 한 정치인이 선거에 출마하며 ‘저녁이 있는 삶’을 말한 적 있다. 생각해보면 그가 말하던 저녁이란 게 내가 추억하는 군불 냄새와 닮은 듯하다. 군불 냄새 속에는 한겨울 추위를 견디게 하는 ‘사람들’의 따뜻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바로 내 가족이자, 더불어 사는 우리 이웃들이었다.


소득이 늘어나고 세상은 발전하는데 이상하게 갈수록 사람은 그리워지는 세상이다. 이웃은 그저 남일 뿐이고, 내 아이 비싼 옷값은 아깝지 않아도 이웃 아이 밥 한 끼 사줄 돈은 아까운 게 당연해진 우리를 보니 군불 냄새 가득하던 그 시절이 더 그리워진다. 올해는 우리 마음에도 군불이 조금씩 피어났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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