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단재 신채호 선생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늘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역사란 기록의 연속이다. 오늘의 작은 기록을 켜켜이 쌓아 올렸을 때 역사란 거대한 나무가 완성된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임진왜란 등 많은 위인과 거대한 사건만이 역사가 아니다. 돌을 갈아 도구로 쓰고 농사를 짓는, 흙으로 그릇을 빚어 식량을 담는 등 이런 단순 행위가 ‘신석기 시대’라는 역사의 한 면을 만들어냈듯 오늘, 우리가 만드는 작은 삶의 기록들이 훗날 역사란 이름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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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은 신라시대만 해도 황산강(낙동강)을 경계로 가야와 맞서고 왜구 침략을 방어하는 전초기지였죠. 삽량주는 한 때 영남 12개 군과 34개 현을 관할한 곳으로 수도(경주) 다음으로 큰 마을이었습니다. 이런 역사를 사람들은 잘 몰라요. 자긍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의 기본적인 이야기 정도는 알아야하지 않을까요? 그게 시작이었죠”
지역 역사. 향토사(鄕土史) 연구에 30년 외길을 걸어온 사람이 있다. 양산시민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정진화 전(前) 향토사연구회장 이야기다.
정 전 회장이 향토사를 본격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83년 당시 물금면장에 취임하면서 부터다. 면장 취임사에 약속한 내용 가운데 하나가 물금면지 편찬이었다. 정 회장은 “우리가 이 곳에서 나고 자랐는데 마을 역사에 대해 정리한 일이 전혀 없었다”며 “주민들이 마을에 대해 알고, 마을의 크고 작은 역사를 정리하고, 전통을 바로 세워 주민들에게 알려야 겠다는 마음에 면지 편찬을 약속하게 된 것”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실제 면지 편찬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역사라는 게 기록을 바탕으로 하는데 물금면지 편찬에 필요한 기록이라곤 사실상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는 수없이 정 전 회장은 직접 발품을 팔았다. 업무를 마친 저녁이면 매일 마을 어르신들 댁을 찾아가 옛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하나 둘 모은 자료가 책으로 이어지기까지 14년이 걸렸다. 정 전 회장이 면장을 그만 두고도 한참 지난 일이다. 면장 8년에 이어 농지개량조합장 시절에도 작업은 계속됐다. 면지(面誌)에서 읍지(邑誌)로 이름도 바뀌었다. 그렇게 1997년에서야 최초의 물금읍(면)지가 탄생했다.
“이유는 하나였어요. 내가 살아가는 고장에 역사가 하나도 기록되지 않았다는 게 안타까웠던 거죠. 그렇게 시작하니 향토사를 정리하는 일에서 손을 못 떼겠더라고요. 돌아보니 어느 새 30년이 넘었네요”
물금읍지 제작 이후 정 전 회장은 향토사 연구를 계속했다. 2001년에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끼리 모여 향토사연구회를 조직했다. 지역 원로와 학자를 중심으로 한 향토사연구회는 지난 2013년 문화원 내 향토사연구소와 합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자료 구하는 일이 가장 힘들죠.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양산과 관련한 내용이 한 줄, 한 단어라도 나오면 모조리 찾아 기록하는 거죠. 조선왕조실록, 비변사 등 그나마 기록이 남아있는 경우는 차라리 쉬워요. 부산이나 김해 등 인근 지역 학교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없는 자료 챙길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힘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료조차 풍족하지 않은 지역 역사란 더욱 그렇다. 딱히 돈이 되는 일도, 누군가 크게 알아주는 일도 아니다 보니 의지만으로 버티기 쉽지 않은 작업이다. 하지만 함께 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포기하는 가운데도 정 전 회장은 책 출간을 멈추지 않았다. 30여년 세월 동안 정 전 회장은 양산사료총람 제2집 ‘역대 목민관의 활동’까지 모두 12권의 책 출간을 함께하고 12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야말로 양산 역사의 총람이다.
“우리 역사는 사실 배척의 역사에요. 자신의 뜻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많은 진실을 외면해 왔죠. 국사(國史)가 그래서 열악한 겁니다. 지역사는 오죽하겠어요? 이런 이유로 역사 복원이 필요한 거고, 역사 복원은 지역사 정리와 기록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분분한 현 시대에 정 전 회장의 ‘배척의 역사’라는 말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현 세대 몫이 아니고, 사실 그대로 기록을 남겨 후세에 전하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 것. 이런 신념이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기록을 찾아 ‘현장’을 누비게 만드는 원동력인 듯하다.
“양산은 최근 20여년 동안 신도시를 개발하면서 엄청나게 성장했죠. 많은 외부 사람들이 들어와서 터전을 잡았고요. 그런데 이렇게 도시가 커져 가는데 역사ㆍ문화적으로는 어떻게 변해 가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어요. 샵량시대, 그 큰 역사를 강조하면서도 실제 우리 삶에 그것들을 어떻게 복원해서 삽입할지는 연구하지 않아요. 훌륭한 문화를 실제 우리 삶에 융합시킬 때 바로 도시가 건전하게 성숙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고유문화가 현재 콘크리트 문화 속에 배합돼야 튼튼한 뼈대가 되고, 그 속에 사는 시민 역시 건전한 사고를 하게 된다고 믿습니다. 먹고 사는 것만 중요한 도시는 사람이 사는 도시와 어울리지 않아요. 그게 제가 역사를 연구하는 이유인 겁니다”
↑↑ 정 전 회장이 편찬한 향토사 책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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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 그 마을 조상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기록하고, 그 기록을 바탕으로 다음 세대가 내일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정 전 회장. 정 전 회장은 자신 소망을 묵묵히 지지해준 가족과 책 출간에 항상 지원을 아끼지 않은 양산문화원에 감사의 뜻을 전하며 앞으로도 향토사 연구를 계속할 것을 약속했다.
한편, 정 전 회장은 지난해 출간한 <양산사료총람 제2집 ‘역대 목민관의 활동’> 편찬위원장을 맡았다. 2006년 양산사료총람 제1집에 이어 10년 만에 내용을 보충해 재출간 했다.
‘역대 목민관의 활동’이라는 소제목에서 알 수 있는 이번 총람은 역대 양산지역 벼슬아치를 총 정리한 것으로 신라 만고충신 박제상에서부터 현 나동연 양산시장과 양산시의회 의원들까지 기록하고 있다.
정 전 회장은 “목민관들의 활동은 그 자체가 지역의 역사”라며 “그동안 양산지역 목민관에 대해서는 사실과 다른 기록들이 많아 그걸 바로 잡기 위한 책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편찬 이유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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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화 전(前) 향토사연구회장
1934년생. 양산시 어곡동 화룡 1212번지 출생.
약력
물금면장(1983~1989년)
양산농지개량조합장(1993~1999년)
양산향토사연구회장ㆍ부회장(2001~2009년)
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탑 보존위원회장(2010~2012년)
양산충렬사지 편찬위원장(2011~2012년)
경남향토사연구협의회 부회장ㆍ회원(2001~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2003~현재)
양산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 자문위원(현재)
상훈
양산시민대상(문화분과)(2007년)
국가기록 선진화 공로 국무총리 표창(2012년)
편찬 도서
물금읍지(1997년)
임경대소고(2003년)
양산항일독립운동사(2004년)
양산사료총람 제1집(2006년)
양산읍사(2009년)
6.25 전몰군경 전사록(2009년)
양산초등학교 100년사(2012년)
양산충렬사지(2012)
양산사료총람 제2집(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