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국가유공자 여러분과 보훈가족들이 사회로부터 존경받고 제대로 대접 받아야하는 게 대통령으로서의 저의 소신이고 분명한 의지”라며 “제대로 된 보훈이야말로 국민통합을 이루고 강한 국가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 의지와 달리 아직 우리사회 곳곳에는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도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는 ‘숨은 영웅’이 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끝내 나라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지 못한 한 ‘유공자’의 삶을 알리려 한다.
이 이야기는 지금은 고인이 된 배효원이라는 한 인물의 이야기지만 모든 숨은 유공자를 대변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글은 가족 증언과 각종 증빙 서류를 바탕으로 배 씨가 직접 이야기하는 형태로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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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시민신문 |
“그때 내 나이 열아홉이었어. 그야말로 한창 때였지. 광복의 기쁨도 맛봤고 이제 동네에서도 어른대접 받을 때였어. 연애도 하고 말이야. 참 좋은 시절이었는데 전쟁이 났어. 정신없었지 뭐. 사실 처음 북한군이 쳐들어온다 했을 때도 그렇게 놀라진 않았어. 미군도 있고, 무엇보다 한민족이잖아. 그렇게 큰 전쟁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지.
그런데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됐다더군. 물론 우린 그 사실도 한참 후에야 알았지. 전쟁이 길어질 거라곤 생각 안 했어.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야. 전쟁터는 점점 남으로 내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상도가 함락될 수 있다는 얘기도 들리더라고.
그때부터 우리 마을에도 징집이 시작됐어. 젊은이들이 죄다 끌려가야 했지. 자발적으로 총을 잡은 사람도 있고 어쩔 수 없이 끌려온 친구들도 있었지. 자기발로 왔건 끌려왔건 어차피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어. 전쟁통이었잖아. 어차피 싸우지 않으면 물러설 곳도 없었거든.
그렇게 난 8월에 입대했어. 정확히는 8월 20일이야. 전쟁이 난지 두 달이 채 안 된 때지. 잊을 수 없는 기억이야. 그날 처음 총이란 걸 잡아봤거든. 묵직하더라고. 총을 잡으니 그제야 내가 군인이 된 게, 곧 전쟁터로 가야 한다는 게 실감나더군. 솔직히 무섭더라.
훈련소에서 잘 때 고향생각 많이 했어. 보고 싶었어. 20년 가까이 한 동네서 살 부비고 자란 친구들도, 그때 내가 마음에 두고 있던 건너 마을 순덕이도…. 무엇보다 어머니 생각 많이 났어. 정말 보고 싶었어. 두 번 다시 어머니 얼굴 못 보는 건 아닐까, 멀쩡하게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전쟁은 언제 끝날까…. 밤마다 온갖 생각들로 잠을 설쳤어. 울기도 많이 울었지. 나만 울었겠어? 나보다 어린 학생도 많았는데 밤마다 엄마 생각에 눈물 많이 훔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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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달 동안 훈련소에서 군인으로 길러졌어. 훈련은 힘든지 안 힘든지 그런 것도 못 느꼈어. 그냥 정신 없었어. 훈련 한 달 되던 날, 부대로 배치됐어. 미8군 62공병대. 정말 군인이 된 거지. 부대 배치 5일 전 그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이 있었어. 부산 함락을 걱정할 정도였던 전세를 역전하기 시작한 계기지.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미군은 북진하기 시작했어. 우리 부대도 수차례 전투 끝에 오산까지 밀고 올라갔어. 그러는 사이 해가 바뀌고 매서운 겨울 추위가 극에 달하고 있었지.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기대, 머지않아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무엇보다 보고 싶은 어머니를 살아서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의지를 불태웠어.
그런데 희망이 너무 컷던 탓일까? 난 그때 평생 잊지 못할 끔찍한 순간과 마주해야 했어. 1951년 2월 3일.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그 날 말이야.
오산지구 전투. 난 3명의 미군과 함께 야간 정찰을 나갔어. 칠흑 같은 어둠이었지. 바람은 매서웠고. 수차례 전투로 닳아버린 군복은 칼바람을 거의 막아주지 못하던 그날 밤. 순찰에 나선지 30분쯤 됐을까? 전투화 발바닥에 딱딱하면서도 서늘한 쇳덩어리가 느껴졌어. 섬뜩했지. 순간 내 몸이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어. 굉음과 함께 말이야. 내 기억은 거기 까지야.
고통 속에 눈을 뜨니 온몸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더라고. 머리는 깨질 것 같고 몸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느낌이었어. 고통스러워 고함을 질렀지. 하지만 내 고함소리는 금세 묻혀버렸어. 야전병원. 그곳에는 죽음의 문턱에서 사투를 벌이는, 나보다 훨씬 심각한 부상을 입은 동료들이 넘쳐났거든.
군의관이 내가 지뢰를 밟았고, 3일 만에 눈을 떴다고 말해주더군. 머리에 6개, 가슴에 4개, 아랫배에 1개, 오른쪽 다리 2개, 그 외에도 왼팔, 사타구니, 대퇴부 등 수십 개 파편이 내 몸에 박혀있다는 얘기도 함께 전했어. 그런데도 다행이라더군. 함께 순찰하던 미군 3명은 모두 그 자리에서 전사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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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난 부산으로 후송됐어. 약 5개월 동안 치료를 받았지. 누군가는 ‘목숨이라도 건져서 다행’이라고 말하더군. 과연 다행이었을까? 몇 차례 수술 끝에도 파편을 모두 제거하진 못했어. 어쨌거나 난 그해 7월 15일 하사 계급을 끝으로 명예전역 했지. 끔찍한 고통을 몸속에 지닌 체 말이야.
제대 후 결혼도 하고 자식들도 낳았어. 하지만 몸속에 박힌 지뢰파편은 내게 늘 고통을 안겨줬어. 술을 찾는 날이 늘었지. 고통을 잊기 위한 것이었지만 좋은 선택은 아니었단 걸 나도 알아. 아내와 자식들에게 미안할 뿐이야. 가장으로서 역할도 제대로 못 했으니까.
그렇게 폐인처럼 난 50년 가까이 살아왔어. 삶을 마무리하는 지금 가족들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못해서 미안해. 유공자로 인정이라도 받았더라면 남겨진 가족들에게 조금 덜 미안할 것 같은데, 난 인정도 못 받았거든. 온몸에 지뢰 파편을 지니고 사는데도 난 전쟁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어.
전쟁에 참가했고, 부상당했지만 군의관들은 내게 ‘등외’ 판정을 주더라고. 등급 외라는 거지. 돼지고기 등급 매기듯 부상 정도에 따라 1급, 2급 나누는데 난 등급자체를 줄 수 없는 ‘경미한’ 수준이라는 거야. 분노를 넘어 허무하더라고. 내가 무엇을 위해 총을 들었으며, 누구 때문에 끔찍한 고통 속에 살아왔던가 하고 말이야.
내 삶이 꺼져가는 시점에 누구 잘잘못을 따지자고 이런 이야길 꺼내는 건 아냐. 그냥 이대로 떠나기엔 가족에게 너무 미안해서 말이야. 지금도 내가 전쟁에 참가한 걸 후회하고 싶진 않아. 나라를 위한 길이었지만 내 가족을 지키는 일이기도 했거든.
하지만 내 자식, 내 손자들에게도 전쟁이 나면 총을 들고 나가 싸우라고 말할 자신은 없어. 그러기엔 내 지난 50년 삶이 너무 힘들었어. 이기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해해줘. 아니 이해하지 못해도 어쩔 수 없어. 그만큼 난 고통스러웠으니까.
아무튼 삶을 마감하며 우리 가족에게 꼭 하고픈 얘기가 있어. 하나 뿐인 우리 예쁜 아내, 평생 불구나 다름없는 내곁을 지켜줘서 고마워. 우리 사랑스런 5남매, 너희에겐 평생 짐이 되기만 한 아버지라 미안해. 남겨줄 게 없어 더욱 미안하고. 그래도 사랑해. 먼 훗날 하늘에서 다시 만나. 그땐 좀 더 멋있는, 훌륭한 아버지가 돼 있을게. 잘있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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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 씨가 1990년 국가유공자 등록을 위해 받은 신체검사표(사진 왼쪽)와 국방부로부터 발급받은 국가유공자 요건 해당 사실확인서(사진 오른쪽)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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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면 내포리에서 태어나 1950년 8월 20일 19세 나이로 6.25전쟁에 참가한 배효원 씨는 이듬해 2월 3일 경기도 오산전투에서 지뢰를 밟아 부상을 입었다. 부대 내 응급치료 후 야전병원에서 3일간 치료받고, 다시 부산 15육군병원으로 옮겨 5개월 간 치료 받았다. 치료 후 배 씨는 1951년 7월 15일, 입대한 지 약 11개월 만에 부상으로 명예전역했다.
제대 후 배 씨는 1990년 <국가유공자 예우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전상군경으로 인정받았다. 국방부에서도 국가유공자 요건에 해당한다며 사실 확인서를 발급해줬다. 하지만 같은 해 국가유공자 등록을 위해 실시한 신체검사에서 ‘등외’ 판정을 받아 아무런 지원혜택을 받지 못한 채 살아왔다.
1994년 다시 실시한 신체검사에서도 ‘등외’ 판정을 받았다. 배 씨는 지난 1995년 1월 사망했다. 남겨진 아내 신아무개(82) 씨는 현재 치매로 요양병원에 있으며, 자녀 5남매 역시 힘든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최근 개정한 <참전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다시 한 번 국가유공자 등록을 신청할 계획이지만 기대가 크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