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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특집I물금읍 인구 10만 시대] 강산도 변한다더니… 농..
기획/특집

[특집I물금읍 인구 10만 시대] 강산도 변한다더니… 농지에서 주거지역으로 완벽한 변신

장정욱 기자 cju@ysnews.co.kr 입력 2017/10/24 11:53 수정 2017.10.24 11:53
상전벽해(桑田碧海) 보여준 물금
늘어난 인구만큼 생활환경도 변화

각종 공공기관 신설ㆍ이전으로
양산지역 최고 중심으로 ‘우뚝’

종합복지타운ㆍ황산공원 등
아직 끝나지 않은 변화 기대감 ↑

지난달 10만을 돌파한 물금읍 인구 증가가 지칠 줄 모르고 이어지고 있다. 10만 인구에 걸맞게 문화ㆍ체육시설 확충 등 각종 개발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다. 양산신도시 개발 20년, 물금신도시 개발 10년 남짓 세월 동안 급증한 인구를 고려해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춰왔다. 그리고 물금읍 변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무엇이 달라졌고, 어떤 게 달라질지 기대가 크다. 물론 변화에 ‘밝음’이 있으면 ‘어두움’도 있는 법이다. 물금은 풀어야 발전하는 만큼 새로 풀어야 할 숙제도 늘어나고 있다. 급격히 변해가는 물금읍이 앞으로 어떤 형태로 ‘진화’할지, 그리고 진화를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지 주제별로 심층보도를 연재한다.



1. 물금읍 10년, 이만큼 달라졌고 이렇게 달라진다
2. 발전의 이면(裏面)… 물금읍이 풀여야 할 과제들
3. 계륵(鷄肋)이 돼버린 부산대양산캠퍼스, 해결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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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메기들’은 물금 변화 역사 시작이다. 과장을 조금 섞자면 물금신도시 변화의 ‘모든 것’이라 할 정도다. 곡식이 영글어가던 너른 들녘에는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광활했던 벌판에는 ‘영세불망비’만 남긴 채 부산대학교 양산캠퍼스와 초대형 대학병원이 자리를 잡았다. 오봉산 아래는 국민체육센터와 시립도서관이 새로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터를 마련했다.


행정기관도 옮겨왔다. 양산경찰서가 중부동에서 범어리로 자리를 옮겼고, 금정세무서 양산지소도 물금신도시 상업지역 중심에 자리 잡았다. 초ㆍ중ㆍ고등학교 역시 사람을 따라 하나둘 늘어났다. 늘어난 인구보다 더 빨리 상업시설들이 자리를 잡았고, 영화관과 공원 등 휴식 공간도 하나 둘 채워지기 시작했다.

















↑↑ 2009년 4대강 정비사업 전 비닐하우스 농사가 한창이던 낙동강 모습.
ⓒ 양산시민신문














↑↑ 2017년 현재 각종 휴식공간이 들어선 황산공원 모습. 농지에서 공원으로 변신한 낙동강 일대는 달라진 물금읍 위상과 시대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변화다.
ⓒ 양산시민신문



그 가운데도 손꼽히는 변화는 전체 18만2천506㎡ 규모 디자인 공원이 지난해 준공했다는 점이다. 공원은 국제 규격 축구장 2면과 야외공연장, 휴게시설, 유아물놀이장과 놀이터, 산책로 등을 갖췄다. 야외결혼식도 가능해 공원 정비가 모두 끝나면 많은 주민 이용이 예상된다.


이곳에 들어설 예정인 종합복지타운도 주민 생활 편의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장애인ㆍ노인ㆍ아동과 함께 시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양산지역 복지허브가 될 종합복지타운은 나동연 양산시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직접 건립 계획을 설명할 정도로 관심이 높다.


2020년 준공 계획인 종합복지타운은 물금신도시 디자인공원 인근 1만1천99㎡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건립한다. 사업비는 약 500억원을 예상하며, 330㎡ 규모 특수재활수영장을 비롯해 발달장애인지원센터, 노인주간사업장, 베이비부머 세대를 위한 50플러스 사업장, 일자리창출사업장, 시민문화공간ㆍ건강체육공간 등 다양한 시설이 들어선다.


복지타운 내 들어설 육아종합지원센터도 관심이다. 특히 물금지역 전입 인구 상당수가 2~30대 영ㆍ유아를 키우는 여성이라 육아종합지원센터 역할에 기대가 높다. 육아종합지원센터는 연면적 2천300㎡ 부지에 지상 4층 규모로 올해 12월 착공해 내년 연말까지 건립한다는 계획이다. 국공립어린이집, 장난감 대여점, 그림책도서관, 아이들 체험ㆍ놀이공간을 마련하고, 기타 육아지원 특성화 프로그램 등도 제공한다.


남은 변화 가운데 낙동강과 황산공원 개발도 빼놓을 수 없다. 논란 속에 진행한 4대강 정비사업 결과 물금 낙동강 인근에 조성된 330만㎡ 규모 황산공원은 조성 5년여 만에 물금을 넘어 양산지역 최대 시민 휴식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각종 수목을 식재하고 숲을 조성해 시민 쉼터를 만들었고, 다양한 꽃들이 봄가을 나들이객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지난해 조성한 국민여가캠핑장은 개장 1년여 만에 예약이 어려울 정도로 인기가 높다. 공원 곳곳에 조성한 축구장과 야구장, 족구장 등 체육시설은 시민 건강 시설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황산공원은 지금껏 조성한 것 보다 더 많은 계획이 남아있어 기대가 크다. 낙동강을 바탕으로 각종 수상레저시설을 추진 중이며, 공원 내부에도 미니열차, 짚라인(zipline), 번지점프 등 다양한 놀이시설을 고민하고 있다.


물금역 정차 열차도 늘어나고 있다. 지역 정치권 집요한 요구로 코레일은 최근 물금역에 정차하는 무궁화호와 새마을(ITX)호 등을 늘렸다. 덕분에 출ㆍ퇴근 직장인은 물론 일반 주민들도 부산을 오가기 편해졌다. 인구 증가로 물금역 이용객이 계속 늘어나는 만큼 머지않아 KTX 정차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한다.


기초의원 증원 소식도 들려온다.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정치권에서는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선거구 조정을 통해 물금지역 기초의원(시의원)이 늘어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민의(民意)를 대변할 ‘일꾼’이 늘어난다는 소식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물금지역에만 국한하는 것은 아니지만 양산세무서 신설도 반가운 일이다. 지역 정치권 노력으로 양산시는 최근 행정자치부로부터 금정세무서 양산지서를 양산세무서로 승격을 약속 받았다. 물금읍은 물론 양산 전체 세무행정 서비스 질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처럼 물금지역에는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크고 작은 변화들이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다만 성장에는 반드시 ‘성장통’이 따르는 만큼 다양한 마찰에 대한 적절한 대비책도 함께 고민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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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금의 어제와 오늘을 말하다



옛 지명 황산(黃山)… 신라ㆍ가야 경계
삼국사기에 자유무역지대로 역할 기록
1994년 신도시 개발계획으로 발전 계기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물금은 평야가 해발 30m 이하고 마을 주위 전답은 해발 100m 이내에 불과한 저지대로 고대는 바다였다가 낙동강이 홍수 등으로 퇴적이 계속되면서 육지화가 됐다.


물금은 남해바다와 낙동강이 통하는 해구(海口)여서 532년(신라 법흥왕 19년) 금관가야가 완전 투항할 때까지 400년 이상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김해 금관가야가 들어선 후 그 세력 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해상교역이 왕성했던 가야가 물금 오봉산 일대에서 생산한 철을 일본 등으로 내다팔아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신라는 접경지역인 물금에 대한 세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으나 가야 세력 확장을 억제하기 위해 전쟁을 한 기록이 남아있다.


현재 물금, 원동 일대 낙동강을 과거에는 황산(黃山)으로 불렀는데 삼국사기에는 77년(탈해이사금 21년) 신라가 황산진 입구에서 가야군사 1천명을 잡았고 115년(지마이사금 4년) 왕이 군사를 이끌고 황산을 지나는데 가야 기습공격에 퇴각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264년(미추이사금 3년) 왕이 황산을 돌아보며 늙은이와 가난한 자를 돌봤다고 돼있다. 가야가 400년 광개토왕이 이끄는 고구려, 신라 연합군 공격을 받은 후 급격히 세력이 약화되면서 물금은 신라 영역으로 굳혀졌다. 최근 양산서 열린 가야사 학술대회에서 고고학자들은 대체적으로 5세기쯤 신라에 편입됐을 것으로 발표해 대체적인 학계 공감대가 형성돼가고 있는 과정이다.


물금(勿禁)이라는 지명 유래에는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첫째는 통행이나 교류를 ‘금하지 말고 열어둔다’는 뜻에서 비롯됐다는 설이다. 또 다른 설은 이 일대가 낙동강 하류지역으로 홍수 피해를 많이 입어 수해가 없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물을 금한다’고 하여 ‘물금=수금(水禁)’으로 불렸다는 이야기다. 가야와 신라가 대립관계일 때 양국 관리들이 국경인 낙동강을 오가는 사람과 물품 검색이 심해 원성이 높아지자 양측이 “이 지역은 서로 금하지 말자”는 합의를 함으로써 물금이라 부르게 됐다는 설이 좀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1998년 발간된 물금읍지는 삼국사기에 524년(법흥왕 11년)왕이 남쪽경계(황산)를 돌며 국경을 개척했는데 가야왕도 방문했다는 기록으로 봐 국경경비에 지친 지역민들의 고충해소 차원에서 검문검색을 완화해 자유로운 무역지대로 지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물금이 한반도 최초 자유무역지대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구체화하고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837년(희광왕 2년) 경주에서 세력 간 충돌로 살해사건이 일어나 우징이 처자를 데리고 황산진(물금)으로 달아나 배를 타고 청해진대사 궁복에게 가 의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물금에 큰 규모 해상 정박시설이 있었음을 가늠할 수 있다.
이 지역 행정상 명칭은 조선 초기부터 서면에서 상서면 다시 하서면으로 변경됐다가 1936년 물금면으로 개칭했는데 일제가 가야시대 왜에 공급된 철 생산지로 자신들과 교류 역사에 주목한 결과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물금은 1983년 교리, 어곡 일대가 떨어져 나가면서 면적이 대폭 줄어 위상 저하를 가져왔으나 1992년 범어택지개발로 주거단지를 확대한데 이어 1994년부터 시작한 신도시 조성으로 논이었던 700여만㎡ 부지를 개발해 상전벽해 발전 계기를 맞았다. 현재 친수공간이 즐비한 아파트 단지 37곳이 들어서고 양산부산대병원 개원으로 부ㆍ울ㆍ경에서 각광받는 주거지역으로 떠오른 것. 또한 2000년 72만㎡ 면적의 물금ICD(내륙 컨테이너기지)가 들어서 과거 자유무역지대 유래에 어울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최근 기능을 점차 잃어 2030년 사용기한 만료까지 지역개발에 도움될 재생사업 마련 전략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종국 선임기자 ysceo62@ys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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