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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현 편집국장 |
ⓒ 양산시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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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중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윤동주 ‘참회록’ 중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 ‘서시’ 중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윤동주’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학창시설 교과서에서 윤동주 시인은 민족의 한과 고통을 대변한 저항시인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그는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부끄러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창씨개명을 하면서까지 일본 유학을 떠나야 했고, 시대적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던 스스로를 돌아보며, 밤이면 밤마다 자신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으면서 괴로워했다.
윤동주 시인의 시는 쉽다. 어려운 단어나 난해한 문장도 없다. 그의 시가 일상의 언어로 큰 울림을 주는 이유는 숱한 고뇌와 반성이 그 속에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끄러움의 시인 윤동주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남아 있다.
“염치도 좋다! 주리팅이가 없어도 유분수지 어느 아가리서 그런 말이 나오노!” -박경리 ‘토지’ 중
‘주리팅이’라는 말이 있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서 수차례 등장하는 단어인데, 순우리말로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것은 ‘주리팅이’가 있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그저 자신의 허물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뜻이 아니다. 그 허물을 부끄럽게 여겨 남들이 알든 모르든 없애려고 하는 것이 바로 ‘주리팅이’다. 주리팅이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허물을 알고서도 이를 고치지 않으려 한다면 용기가 없는 것이고, 고치기를 꺼려 물러서거나 그만두는 것 또한 용기가 없는 것이다. 용기가 없다면 순간의 허물은 진정한 허물로 남고 만다.
지난 23일 정의당 노회찬 의원이 별세했다. 그는 유서에서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로부터 모두 4000만원을 받았다.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중략>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당부드립니다”고 했다.
정치 성향과 이념, 지지 여부를 떠나 우리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긴 한 진보정치인의 죽음을 보면서 ‘부끄러움’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슬퍼하는 이유는 그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건대 그는 최소한 ‘주리팅이’가 있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흠이 없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흠 없는 사람이 정치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흠 없는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은 이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다만, 정치(政治)를 하는 사람은 참된 부끄러움(正恥)을 알아야 한다.
영화 ‘동주’에서 끝까지 괴로워하던 윤동주에게 정지용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다”
진정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이들은 떳떳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부끄러워해야 하는 정치는 이제 그만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