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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현 편집국장 |
ⓒ 양산시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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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동면 창기마을. 작은 집들 사이로 난 오솔길을 지나면 있는 마을 텃밭 뒤로 나지막한 언덕에 낡은 표지판이 세워진 그리 넓지 않은 빈터가 있다. 굳이 찾고자 발길 하지 않으면 찾아갈 일이 없는 곳, 어떤 곳인지 모르고 간다면 그저 한여름 더위 피하기 좋은 숲속 작은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말 곳, 적막함 속 대나무를 스쳐 지나는 바람 소리만 귓가에 맴도는 곳, 바로 법기리 요지다.
법기리 요지는 동면 법기리 산82 일원에 있는 1천749㎡ 규모의 조선 중기 가마터다. 1963년 국가사적지 100호로 지정됐다. 창기마을 뒤편 산 중턱에서 기슭에 이르기까지 여러 요지가 남아 있었으나, 근래 대부분 논과 밭으로 개간되고, 사람들이 생활하는 집과 무덤들이 들어서면서 많이 훼손된 상태다.
발견되는 그릇 조각을 보면 마을 근처에 있는 가마터는 대체로 17세기 것이고, 산 쪽에 있는 가마터는 대부분 16세기 것으로 추정한다. 산 위쪽에 가마를 먼저 만들기 시작했고, 이후에 점차 아래로 내려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도자기 형태는 대부분 사발ㆍ대접ㆍ접시로, 만든 모양새가 거칠고 투박하다. 발견되는 백자 가운데 굽 형태나 질이 일반 백자와 다른 종류가 보이는데, 이것은 다른 가마와 달리 일본 주문을 받아 수출용으로 특별히 만들어진 찻잔으로 추정한다.
다니 아키라 일본 노무라미술관장 설명에 따르면 법기리 가마는 일본 다도(茶道)가 확립하기 이전부터 혹은 이후에도 한반도에 살던 일반 민중이 사용하는 도자기를 생산해 온 가마인 ‘종래요’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법기리 요지에서 ‘고려다완’ 사금파리가 발견되면서 ‘종래요’와는 다른 형태 사발류를 생산한 ‘차용요’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차용요’는 종래요 가마 일부 또는 전부를 일시적으로 빌려 일본 취향 사발류를 생산했던 가마를 뜻한다.
현재 학자들은 법기리 가마에서 일본인들이 보물로 취급하는 ‘이라보다완(伊羅保茶碗)’이라고 부르는 ‘양산사발’뿐만 아니라 현재 일본에 있는 명품 다완(찻사발) 절반 이상을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양산사발은 표면이 거칠거칠한 특성을 보이는데, 이런 사발류는 법기리 가마에서만 생산했다고 한다.
법기리 가마는 우리나라와 일본 도자 역사에서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일종의 OEM 방식(주문자 생산방식)으로 사발을 만들던 곳인데, 한일 문화교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이다. 이시자키 야스유키 일본 야마구치현립 하기미술관 우라가미기념관 부관장은 “한일 문화교류사를 시작으로 하는 중요한 과제는 법기리 요지의 조사와 연구에 진전이 있어야 비로소 해결 실마리가 담보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동안 법기리 요지에 대해 일본 전문가들은 중요성을 크게 인식했지만, 국내에서는 일부 사기장을 제외하고는 관심 밖이었던 것이 현실이다. 늦었지만 다행인 것은 법기리 요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7월 ‘명품 찻사발’을 만들던 법기리 요지를 발굴ㆍ복원하고 양산 도자기 명성을 되살리고자 NPO법기도자(이사장 신한균)가 창립했고, 지난해 11월에 이어 지난달 30일 법기리 요지 복원을 위한 국제학술심포지엄을 열면서 한일 전문가가 한자리에 모여 법기리 요지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 현재의 위상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심포지엄에는 정치권과 학계, 문화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면서 법기리 요지에 대한 지역의 관심을 대변했다.
소풍을 가서 보물찾기를 하면 보물은 의외로 찾기 쉬운 곳에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럴수록 잘 찾기 어렵다. 보물은 찾기 어려운 곳에 있는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파울 코엘류의 장편소설 ‘연금술사’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눈앞의 엄청난 보물이 놓여있어도, 사람들은 절대로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네. 왜인 줄 아는가? 사람들이 보물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이지”
이제야 우리는 눈앞에 있는 우리의 보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고려다완은 ‘고려’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사발이 아니다.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사발을 고려다완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생산한 문물을 생산 시기와 상관없이 ‘고려 물건’이라고 칭하는 습관이 있는데, 중국에서 생산한 문물도 마찬가지여서 송이나 원, 명, 청나라에서 생산한 것도 모두 ‘당나라 물건’으로 부른다고 한다. 고려다완은 조선 시대 전체를 통틀어 생산하던 것이 아니라 대체로 1500년 전후부터 1700년 전후에 걸쳐 약 200년간 생산한 것으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