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양산시민신문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 주역들의 삶..
기획/특집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 주역들의 삶

홍성현 기자 redcastle@ysnews.co.kr 입력 2019/06/04 09:21 수정 2019.06.04 09:21

■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

올해는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양산에서도 100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 9일 신평 하북 만세운동 재현행사가 펼쳐져 눈길을 끌었다. 이에 앞서 지난 8일 (사)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주관 ‘하북 신평 만세운동 100주년 학술대회’가 열렸다. 동부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인 신평 만세운동을 조명한 첫 번째 학술대회로, 학계와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 가운데 향토사학자 이병길 씨가 발제한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의 내용을 정리해 보도한다. 편집자 주

-----------------------------------------------------------------------------

❚ 오택언(吳澤彦, 1897~1970)

 
↑↑ 오택언(吳澤彦, 1897~1970)
ⓒ 양산시민신문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 따르면 오택언 스님은 1897년 6월 17일 ‘경남 양산군 읍내(邑內)’에서 출생했다. 본적은 경남 양산군 하북면 통도사, 주소는 경기도 경성부 숭일동(崇一洞) 2 중앙학림 기숙사로 기록돼 있다. 신분은 평민(平民), 직업은 학생, 지문(指紋)번호는 67846-76749이다. 수형자 사진을 보면, 입을 꽉 다물어 야무진 모습이다. 뺏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20대 초반 혈기 왕성한 청년이다. 카드에 기록된 신장은 ‘5척(尺) 4촌(寸) 7푼(分)’으로 166.05cm에 해당한다.

1910년 7월 통도사 명신학교 5학년에 재학했다. 통도사 지방학림(?)과 전문강원(?)을 졸업했다. 1918년 4월 서울 중앙학림에 입학해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통도사로 내려와 만세운동을 준비하다가 서울로 압송된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출판법, 보안법, 형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에서 “조선사람이 모멸당하고 일본인과 너무나 차이가 컸으므로 독립을 희망하는 것이다. 만세운동을 통해 나라의 독립이 이뤄진다”고 말했지만, 통도사 스님 박민오와 신평 만세운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재심을 청구했으나 기각되고, 1920년 2월 27일 확정판결을 받았으나, 구류일 180일 본형을 포함해 60일가량 서대문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하고 1920년 4월 28일 출옥했다.

출옥 후 1923년 8월, 마산 수해 구제회 결성 복구기금 회원으로 참가(동아일보, 1923년 8월 24일)했고, 수해구제 음악회 성금 2원을 기부(동아일보, 1923년 9월 6일)했다. 10월에는 마산포교당 불교청년회 결성을 주도하고 이재부장(理財部長)이 됐다.(동아일보, 1923년 10월 14일) 통도사 소속 스님으로 통도사 주지 선거 명부에 등재(1925~192년)됐다. 진주포교사ㆍ마산포교사(1923~1934)를 했다. 1928년 진주불교 포교당 법사, 진주불교진흥회와 불교청년회 주관 석가탄신 기념법회 법문과 진주 극빈 계층 식량, 의복을 시주(동아일보, 1928년 5월 31일)했다. 1929년 5월에 진주청년동맹 주도 ‘경북기근 구제회’에 참가(중외일보, 1929년 5월 15일)했고, 12월에 조선불교 승려대회 개최 발기회 위원(경남 진주 포교사)으로 활동했다.

1934년 통도사 감사를 하고, 1935년 3월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심사위원(동아일보, 1935년 3월 9일)이 됐으며, 1935년과 1939년 양산군 하북면 협의회원으로 선출(조선중앙일보, 1935년 5월 28일ㆍ동아일보, 1939년 6월 1일)됐다. 1941년 통도사 11대 주지 선거에서 6표를 획득(吳州澤彦 오주택언, 45세, 법랍 11년)했다. 1947년 7월 전국불교도대회에 참가해 불교 혁신과 조선불교총본원 설치 등 활동을 했으나 통도사 산중회의에서 당시 중앙총무원 김법린, 재부무장 오택언의 사퇴 촉구해 통도사로 소환당했다.(자유신문, 1947년 7월 13일) 그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1970년 2월 20일 별세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 김진오(金鎭五, 진옥 鎭玉)

신평 만세운동의 유일한 검거자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았다고 알려졌다. 제적등본, 판결문, 심문조서 등이 없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지역 원로들 증언도 없다.

❚ 박세민(朴世珉, 세문世文, 1894~1920)

본적은 양산군 물금읍 가촌리 879번지, 밀양 박씨, 박수홍과 유말랑의 차남, 자는 인보(仁甫), 호적 이름은 박세문, 별명이 세민이다.

3월 13일 신평 만세운동 때 주모자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붙잡히지 않도록 신속한 조치를 해 주모자들이 무사히 피신하도록 했다. 그 후 일본으로 피신했으나 일경 추적으로 검거됐다. 고문으로 빈사 상태에서 석방됐으나 일본 신호시(神戶市, 고베) 장전촌(長田村) 3번지에서 1920년 9월 5일 오전 7시 사망해 유골만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 양산청년회(회장 김철수)에서 ‘청년회장(靑年會葬)’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물금면 범어 덕산아파트 뒷산 선영에 안장했다.

부인 조분이(1897년 생)와 1916년 결혼했으며, 아들 몽주는 강제징용으로 사망했다. 부인은 남편과 아들의 사망으로 정신분열증(조현병)을 일으켜 물금 가촌 일대를 배회하다가 행방불명됐다.

❚ 김상문(金祥文, 1893년 8월 20일~1949년 7월 7일/1951년 2월 27일)

본적은 양산군 하북면 순지리 594의 10번지. 청도 김씨, 김종명과 윤씨일의 장남이다.

신평 만세운동 후 상해로 도피해 임시정부의 경부선(京釜線) 연변(沿邊) 특파원(特派員)으로 활동했다. 특파원 임무는 국내 잠입, 요인 탈출, 독립자금 모금 등이었다. 그는 1919년 8월 25일 임명됐고, 임무는 ‘시위운동에 관한 준비 및 실행’이었다.

1946년 8월 20일부터 1947년 6월 5일까지 해방 후 하북면장 역임했으나,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경찰 연행 후 처형당했다.-양산항일독립운동사(2009)에는 1951년 2월 27일 사망(247쪽), 양산시지(상권)에는 1949년 7월 7일 사망(478쪽)으로 기록돼 있다. 아마 사회주의운동 경력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아들인 김대상(전 부산문화방송국 이사)에 따르면 양산 3.1운동과 양산경찰서 습격 사건 주동자인 전병건(전혁, 1899~1950)과 교분이 있었다고 한다. 전병건은 사회주의자로 해방 후 양산 인민위원장을 지냈다. 그는 한국전쟁 때 양산경찰서에 연행돼 처형당했다.

❚ 양대응(梁大應, 梁萬佑, 梁武弘, 1897~1968)

 
↑↑ 양대응(梁大應, 梁萬佑, 梁武弘, 1897~1968)
ⓒ 양산시민신문  
본적과 주소지는 양산 하북면 지산리 422-김말복의 막내딸 증언에 따르면 신평 김말복(순지리 691번지)의 맞은 편 집에 살았다고 한다-다. 신평 만세운동 참여 후 도피 생활할 때(?), 통도사 구하 스님이 100원을 여행비로 지원한 기록이 있다. 1920년 불교청년회에 가입ㆍ활동하고, 1922년 3월 서울에서 친일승려로 알려진 용주사 강대련(姜大蓮)을 ‘조선불교계의 악마’라 해 명고축출(鳴鼓逐出) 운동을 주동했다. 이 사건으로 1922년 8월 7일 복심법원 판결 결과, 불교청년 강창신, 김상호, 정맹일은 각 6개월, 양무홍은 4개월의 징역을 선고한 동시에 4인이 공히 집행유예를 받았다.-매일신보, 1922년 6월 6일

1925년 11월 울산 해영(海英)학원 사학회(私學會) 창립 간사 임원이 됐다.-시대일보, 1925년 11월 30일- 1926년 울산 불교포교당(현, 해남사)의 야학원장-조선일보, 1926년 8월 18일-을 하며 가극회를 열어 무료 관중 1천명이 봤다. 또 여자 야학을 개설하고 불교청년회를 조직했다.-동아일보, 1926년 9월 6일- 1928년 5월 마산포교당에서 석존 탄생 기념행사- 중외일보, 1928년 5월 31일-를 했고, 12월에 조선불교승려대회 발기회에 마산 포교사로 참석했다. 1929년 1월 조선불교승려대회에 참석해 종헌제정위원이 됐다. 3월에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제7회 평의원회와 조선불교청년회 제2회 정기대회에 참석했다.

1931년 3월 조선불교청년총동맹 회의에 참석했다. 1932년 1월 진주 불교포교당 포교사로 자명(慈明)유치원을 설립ㆍ운영-중앙일보, 1932년 1월 13일-했는데, 1935년 8월에 고성 옥천사에서 보조하던 자명유치원은 경영난 등으로 폐쇄됐다.-조선중앙일보, 1935년 6월 28일- 1932년 3월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중앙집행위원이 됐다. 1941년 통도중학교 김말복ㆍ조병구ㆍ배기철 등 교사가 고종 인산 때 애국지사가 쓴 만장을 학생들에게 교육하는 등 항일ㆍ배일 교육과 관련, 같이 검거돼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45년 해방 후 초대 통도사 주지가 됐고, 항일 배일 교육 사건으로 1944년 폐교됐던 통도중학교를 1946년 보광중학교로 개교했다. 통도사 적멸보궁 사리탑 주변 철제 난간을 석재로 바꿨다.

1952년 하북면 제1대 면의원(1952년, 梁武弘), 제2대 면의원(1956년, 梁大應)을 지냈다.-하북면지(1996), 79쪽- 1968년 2월 28일 물금 용화사에서 입적했다. 정부는 2010년 제91주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 신구담(辛九潭)

현재까지 오택언의 독립선언문 수취인이라는 점 외에 알려진 사실이 하나도 없다.<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 © 양산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