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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통도사에 한국전쟁 당시 육군병원 있었다..
사회

통도사에 한국전쟁 당시 육군병원 있었다

홍성현 기자 redcastle@ysnews.co.kr 입력 2020/06/22 10:55 수정 2020.06.22 10:55
증언으로만 존재하던 육군 정양원 분원
대광명전에 남긴 상이군인 낙서로 확인
군인병원 있었다는 객관적인 증거 확보

통도사 대광명전에 한국전쟁 때 부상병들이 남긴 낙서가 발견됐다. 그동안 통도사에는 ‘제31 육군 정양원 (제2)분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국가 기록 등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해 9월 용화전 미륵불소조좌상의 복장유물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1952년 조성한 연기문이 발견됐다. “6월 25일 사변 후 국군상이병 3천여명이 입사(入寺)하야 1952년 4월 12일에 퇴거(退去)”했다는 내용이었다.

통도사(주지 현문 스님) 의뢰로 이를 조사한 지역사 연구가 이병길(보광중학교 교사) 씨는 “통도사 육군병원 정양원 존재의 객관적 증거가 확보됐다”고 밝혔다. 이 씨에 따르면 전쟁으로 인한 상이군인을 치료하기 위해 만든 ‘제31 육군 정양원 본원’은 부산 동래에 있었고, 통도사에는 ‘정양원 통도사 분원’ 또는 ‘정양원 (제2)분원’이 있었다.

↑↑ 상이군인 낙서가 발견된 통도사 대광명전
ⓒ 양산시민신문

당시 보광중에 다녔던 졸업생에 따르면 처음에는 통도사 천왕문에서 불이문까지의 하로전 영역인 영산전, 극락보전, 약사전 등을 병원으로 사용했다.

안정철(1932년생, 보광중 2회) 씨는 “전각마다 군인으로 가득 찼다. 스님들은 법당에 있었다. 환자들이 있는 곳에는 학생들을 출입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통제했다”며 “사망한 부상병들은 들것으로 학교 앞이나 선자바위까지 옮긴 후 마스크를 끼고 M1 소총에 착검한 군인들이 통도사 화장터에 가서 화장했다. 그리고 일부 상이군인은 마을 여자와 결혼했다”고 말했다.

김두형(1934년생, 보광중 3회) 씨는 “갑자기 들여 닥친 환자들에게 교실을 빼앗긴 학생들은 통도사의 만세루와 명월료 등에서 수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했고, 김학조(1933년생, 보광중 3회) 씨는 “점점 부상자들이 많아져 학생들 기숙사로 사용했던 취운암도 환자 병동으로 사용했다”고 말했다. 류득원(보광중 4회) 씨는 “그러다가 휴전이 진행되는 시기에 환자들은 통도사 경내 전각에 수용했다”고 회상했다.

현 통도사 성보박물관 자리에 있었던 보광중학교는 전쟁이 치열하고 환자가 많았던 시기에 학교가 병원으로 환자 수용시설이 됐다.

통도사 스님들의 증언도 이어졌다. 스님들은 주로 환자들이 통도사에 있었다고 했다.

경봉 스님 맏상좌로 통도사 주지와 영축총림 방장을 지냈던 비로암 원명 스님(1936년생, 1952년 출가)은 당시 노스님들로부터 “당시 육군병원은 암자에는 없었고, 통도사 본절에만 있었다. 전쟁 당시 통도사에는 스님들이 전부 없었고, 원주실 근처 외양간 머슴들이 자는 방에 일암 스님과 만암 스님 두 분이 사셨다. 다른 스님들은 절에서 군인들에 의해 쫓겨났었다. 군인들이 사망하면 한꺼번에 화장터에서 태웠다”고 들었다고 밝혔다. 안양암 무애 스님과 금수암 여산 스님 역시 이와 비슷한 증언을 했다.

당시 통도사에서 공부했던 오어사 원효암의 종원 스님 증언은 좀 더 구체적이었다. 종원 스님은 1936년생으로 1950년 7월, 당시 15세 때 부산 금정사에서 출가했고 통도사에는 1951년 여름부터 1953년까지 있었다.

원종 스님은 “탑광실을 비롯해 스님들은 주로 상로전에 있었기에 실상 군인들이 있었던 중로전과 하로전은 출입을 못 했다. 하지만 상로전에 있었던 명부전과 응진전에 환자들이 즐비하게 누워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대웅전과 노전, 별당을 제외한 모든 전각에는 환자들이 있었다. 통도사 인근 취운암과 사명암에 환자들이 있었지만, 비구니가 있었던 보타암에는 없었다. 나한전에는 중환자들이 많이 죽어 나갔다. 전강에는 군인들이 누워 자고 축담에는 오줌통을 뒀다”며 “겨울에 난로를 피워서 명부전 앞 처마 끝이 거슬러있었다. 군인들은 부처님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다. 당시 병원장은 탑당(주지실)을 사용했다. 보광전에 폭탄(종)을 걸어놓고 신평마을에서 밤에 40여명이 와서 빙 둘러 보초를 서고, 군인들은 남산(5층 사리탑)과 안양암 꼭대기에 보초를 서고 뭔가 움직이면 총을 쏘고 했다”고 말했다.

↑↑ 이별의 낙서 시
ⓒ 양산시민신문

이처럼 마을 주민과 스님들의 증언이 있었지만, 객관적 증거는 없었다. 이병길 씨는 “법당에 행여 증거가 있을까 찾다가 예전에 대광명전에서 낙서를 본 기억을 더듬어 확인했는데 한국전쟁 당시 부상병의 낙서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낙서는 세 종류다. 단기 4284년의 연도 낙서, 퇴원하면서 남긴 낙서 시, 그리고 모자와 탱크ㆍ트럭 등 그림이었다. 이 씨는 “대광명전에 남긴 낙서는 퇴원, 전우, 정전의 낱말과 군모ㆍ탱크ㆍ트럭 그림은 통도사에 육군병원이 있었다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증거”라며 “군인이 아니면 남길 수 없는 객관적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 단기 연도 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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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연도 낙서’는 못과 연필, 칼 등으로 새긴 3개가 발견됐다. 먼저 “4284년 5월 29일 도착하여 6월 12일 떠나간다”는 못으로 새긴 내용이다. 또 연필로 “단기 4284년 4월 29일 퇴원(退院) 상자(傷者) 출발(出發)”이라는 문구도 있었다. 나무 기둥에 칼로 “4284년 6월 10일 평양”을 새기기도 했다.

이 씨는 “낙서의 연대 기록은 조작이 아닌 당시의 것임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또 낙동강 전투에 참전한 군인이 아닌 평양 출신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단기 연도가 1951년 4월, 5월, 6월에 집중적으로 남아있음은 이 시기에 통도사에 상이군인들이 있었고, 퇴원이라는 단어는 병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며 “1951년 10월 이승만 대통령이 제31 육군병원 통도사 분원에 정양 중인 장병들에게 양말 1천600족을 전달한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 이별의 낙서 시
ⓒ 양산시민신문

‘퇴원하며 남긴 낙서 시’는 당시 이곳이 병원이었음을 더 생생히 보여준다. 모두 3편이 있는데 “가노라 통도사야 잘 있거라 전우들아/ 정든 통도를 떠나랴고 하려마는/ 세상이 하도 수상하니 갈 수밖에 더 있느냐”는 시(詩)에는 동료를 두고 떠나는 마음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는 낙서에도 잘 나타난다. “통도사야 잘 있거라/ 전우는 가련다”와 큼직하게 “전우야/ 잘 있거라/ 나는 간다”, “통도사에 이별한다”는 등 낙서가 남아있다. 낙서 중에는 “停戰(정전)이 웬 말?”이란 구절이 있다. 1951년 7월 정전 반대 궐기대회가 서울, 부산 등지에서 일어났다.

이 씨는 낙서를 통해 “당시의 기록으로 볼 수 있다”며 “전쟁 상황이 아니라면 ‘정전’이란 단어는 사용할 수 없다. ‘전우’와 ‘정전’의 용어는 분명 군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 퇴원하면서 남긴 낙서
ⓒ 양산시민신문

아이 얼굴과 모자, 모자 쓴 얼굴, 그리고 건물 등 그림 낙서도 발견됐다. 그런데 군인이 있었다는 가장 결정적인 그림 낙서는 대광명전 북쪽 바깥 마지막 칸에서 나왔다. 탱크와 트럭 그림이다.

이 씨는 “용화전 복장유물과 당시 신문 보도 그리고 대광명전의 그림과 문자 낙서, 마을 주민과 스님의 증언을 통해 한국전쟁 당시 통도사에 육군병원 정양원 분원이 있었음이 분명히 밝혀졌다”며 “통도사 개산 1375년과 한국전쟁 발발 70년을 맞아 통도사가 호국사찰이었음이 밝혀진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 군모 그림 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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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탱크 그림 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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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천만다행으로 대명광전이 7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벽면을 새로 보수하지 않았다”며 “대광명전 낙서는 한국전쟁 당시 제31 육군병원 통도사 분원(정양원)의 존재 증거가 되기 위한 부처님의 선물”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통도사는 나라의 큰 사찰로 호국사찰 역할도 수행해 왔다. ‘호국’(護國)이란 구세불타(救世佛陀)의 성도(聖道)를 생활화함을 뜻한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활동한 통도사, 일제강점기 구하 스님의 독립자금 지원과 통도중학교의 항일민족교육, 한국전쟁 때 육군병원, 월하 스님의 위안부 나눔의 집 건립 보시, 성파 스님의 통일 기원 16만 도자팔만대장경 봉안 등 통도사 스님들은 호국, 평화, 통일의 염원으로 활발히 활동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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