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동진 소토교회 목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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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에는 제사장들이 병을 진료하고 치료하는 역할도 했던 터라 먼저 나병 징조가 보이면 제사장에게 데려가서 진찰을 받았다. 그래서 이 증세가 일반적인 피부병인지 나병인지 구별했고, 피부병이라 할지라도 악성인지 아니면 음성인지를 판별했다. 전염성이 없는 일반 피부병인 경우는 집에 가서 치료받으면 됐지만, 전염성이 있는 악성으로 판정되면 일단 일주일을 격리해 진전을 살펴봤고, 이후 다시 진찰하여 음성이면 집으로 돌아갔지만, 악성일 경우 격리해 관찰했다. 이들이 거주했던 집과 그가 사용했던 집기들은 꼼꼼히 살펴서 곰팡이가 핀 곳을 찾아내 물로 씻거나 불로 태워서 그곳을 청결하게 했다.
최종적으로 나병으로 확진되면 그는 그 자리에서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치며, 병든 자신의 처지를 슬퍼했다. 그리고 그는 동네와 떨어진 곳에서 격리돼 생활해야 했으며, 마을에 갈 일이 있을 때는 손으로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치며 다녀야 했다. 자신이 나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서 병의 전염을 막고자 한 것이다.
병이 들어 고통받는 것도 힘든데 그들은 사랑하는 가족과 세상과 격리돼야 했고,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항상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치며, 자신이 불결한 존재임을 각인해야 했던 것이다. 정말 잔인한 규례다. 하지만 이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시행해야 했고, 병자 또한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을 보호하기 위해서 더 나아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규례였다. 가혹한 현실 속에서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지만, 이는 전적으로 나병 환자들의 희생이 따라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정결법에는 나병 환자들이 다시 회복했을 때 사회로 복귀하는 방법도 함께 두고 있다. 당시 나병을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는 몰라도 그들이 치료되리라는 염원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기적이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든 이스라엘 공동체는 병든 그들이 회복해서 사회로 복귀하기를 늘 바라도록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정결법은 변질됐다. 사람들은 나병 환자들을 격리하기 바빴지 그들이 다시 치료돼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는 소극적이었다. 공동체 안전을 위해 나병 환자들이 규례에 따라 격리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남의 안전을 위해 부정하다고 외치는 그들의 말은 말 그대로 그들을 부정한 존재로 몰아갔으며, 하나님이 저주한 사람으로 인식되게 했다. 그래서 나병에 걸리게 되면 말 그대로 저주받은 인생이라 체념했고, 시체처럼 여겼으며, 죽는 순간까지 고통 속에서 살았다.
예수님은 그런 나병 환자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그들을 스스럼없이 만났고, 그들의 몸을 어루만졌으며,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치료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당시 그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나병 환자를 저주받은 인생이라 생각해 어떻게 하든 그들과 떨어져 살고자 했지 내가 보듬어주고 치료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나병 환자를 보듬어주고 그들을 치료하는 예수님 행동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리고 결코 치료되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나병이 그들 눈앞에서 치료되는 것을 보았다.
요즘 코로나19로 인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패턴이 바뀌고 있다. 이제는 마스크를 쓰고, 안전거리를 띄워 인사하고 말하는 것이 당연한 예절이 됐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 이전에 당연했던 모임을 자제해야 하고, 때로는 강제로 억압되기도 한다. 학교 수업과 종교행사도 비대면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많은 사업장이 제약을 받고 있다. 희생이 강요되는 상황이다. 아니 서로를 배려하며 희생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으며, 서로를 보듬고 회복하고자 하는 소망의 끈을 놓지 않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새로운 생존법을 익히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