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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드레퓌스 사건과 근대 ‘지식인’의 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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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 사건과 근대 ‘지식인’의 탄생

홍성현 기자 redcastle@ysnews.co.kr 입력 2021/09/14 14:06 수정 2021.09.14 14:06

전대식
양산시 문화관광해설사
코로나 블루가 코로나 블루인지도 모르고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요즘,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 또 있다. TV만 켜면 코로나보다 더 먼저 더 길게 나오는 대선 후보 관련을 포함한 정치판 뉴스가 그것이다. 고소, 고발, 네거티브에 무슨 사주(使嗾) 사건도 있다. 점입가경이다.

최근 프랑스 근대사의 흥미로운 한 사건,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글을 읽었는데, 지금 우리가 보는 여러 사건의 부분 부분을 합성해놓은 종합판과도 같은 사건이라 소개하고자 한다. 흔히 쓰이는 ‘지식인’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계기가 돼 근현대 지성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기도 하다.

1898년 1월의 어느 오후, 프랑스 파리의 신문 가판대에 깔린 석간 『로로르(L’Aurore)』지(紙)에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대통령에게 보내는 장문의 공개서한이 1면 톱을 장식했다. 에밀 졸라는 『목로주점』, 『나나』 등으로 잘 알려진 당대 유명 작가다. 신문은 순식간에 30만부가 팔려나갔고 프랑스는 곧바로 이념적인 내전 상태로 빠져들었다.

졸라는 이 글에서 독일 간첩 누명을 쓰고 투옥됐던 유대인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무죄이며, 진실을 은폐하려는 프랑스군을 '범죄 집단'이라고 비난했다.

‘대통령 각하에게, 저는 진실을 말씀드립니다. 사법부가 진실을 밝히지 않을 경우 제가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말을 하는 것이 저의 의무입니다. 왜냐면 저는 역사의 공범자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1894년 군사기밀 자료가 독일측으로 유출된 간첩 사건이 발생했다. 드레퓌스는 다른 뚜렷한 증거 없이 필적이 동일하다는 감정을 받고 반역죄로 체포돼 이듬해에 영화 ‘빠삐용’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악마도에 종신 유형(流刑)을 받았다.

1896년에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발견되자 군 상층부는 증거 조작을 사주해 이를 은폐한다. 사주를 받아 증거를 조작했던 앙리 중령은 감방에서 자살하고, 진범인 에스테라지 소령은 무죄 판결은 받았지만, 혐의가 점점 드러나자 영국으로 도망쳐버렸다. 그래도 드레퓌스는 혐의를 벗지 못했고, 다만 ‘국민화합’이라는 미명으로 1899년에 사면을 받아 석방됐다.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은 졸라의 공개서한이었다. 뜻을 같이하는 이들도 있었다. 여론은 친드레퓌스파와 반드레퓌스파, 재심파와 반대파, 좌파와 우파, 공화파와 왕당파, 개신교와 가톨릭, 시오니즘과 반유대주의 등으로 갈라져 프랑스는 내전을 방불케 하는 이념의 전쟁터가 돼버렸다.

당시 프랑스는 독일과 전쟁에서 황제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는 등 여지없이 참패해 군과 국민의 사기가 극도로 떨어져 국면전환이 절실히 필요했던 때였다. 군부는 독일점령지역 출신 유대인 드레퓌스를 희생양 삼아 ‘독일’, ‘유대주의’, ‘배신자’ 등 프레임을 씌워 여론을 부추겼다. 국민과 언론과 종교는 양분돼 국가 이익과 개인 권리를 둘러싸고 극심한 대립에 빠졌다. 졸라는 이 글로 인해 짧은 기간이지만 영국으로 떠나는 망명객 신세가 됐다.

드레퓌스는 1906년에 최고재판소 재심에서 최종 무죄 판정을 받고 군에 복귀했다. 판결 후 그는 ‘조국에 감사한다, 조국은 결국 진실을 밝혀냈다’는 소감을 피력했다. 숙연해지기까지 한 대목이다. 그러나 정작 군은 자신들 오류를 끝내 인정치 않고 있다가 사건 발생 101년 후, 드레퓌스 사후 60년이 지난 1995년에야 드레퓌스의 무고함을 인정했다.

증거 조작, 조직적인 은폐, 프레임 씌우기, 집단 광기, 조작 사주, 관련자의 석연치 않은 죽음, ‘소설’ 쓰기, 여론몰이, 마녀사냥, 저열한 수사 방식, 여론에 춤추는 사법기관, 재심을 통한 무죄 판정, 당사자 사후 수십 년 후의 권력기관의 과오 인정, ‘국민화합‘ 운운…. 드레퓌스 사건에서 나타나는 이 모든 것들은 지금 우리 모습과 다름없다.

이 사건으로 사회적 정의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집단행동을 하는 현실 참여형 지식인 집단이 등장했다. 생각은 같이해도 공개적으로는 밝히기를 꺼리는 사람이 많지만,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다”고 외친 에밀 졸라와 같은 이들을 당시의 신문들은 ’지식인(Intellectual)’이라고 불렀다. 이른바 근대 ‘지식인‘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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