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양산시민신문

봄데 꼴데(2) - 느그 가을야구 안 할끼가?..
오피니언

봄데 꼴데(2) - 느그 가을야구 안 할끼가?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1/11/09 13:51 수정 2021.11.09 13:51

서용태
인문연구공동체 로두스 대표
육군3사관학교 인문학처 강사
1982년 출범 당시 우승 1순위 ‘삼성라이온즈’는 모기업의 든든한 지원을 바탕으로 선수단 대부분이 국가대표 경험을 가진 선수들로 팀이 꾸려졌다. 선수층이 넓은 서울을 연고로 해 우수한 선수들을 많이 확보한 ‘MBC청룡’도 우승 후보였다. 그리고 미국파인 박철순과 윤동균이라는 스타플레이어를 가진 ‘OB베어스’는 다크호스로 불렸다. 반면에 연고지 내에 군산상고 외에는 이렇다 할 야구명문고를 보유하지 못한 ‘해태타이거즈’는 한 경기를 치르기에도 버거운 고작 14명의 선수만으로 창단했다. ‘삼미슈퍼스타즈’ 또한 연고지 내에서 국가대표 출신을 단 한 명도 확보하지 못한 채 겨우 선수단을 꾸렸다.

삼성이나 MBC만큼은 아니지만 ‘롯데자이언츠’는 연고지에 경남고와 부산고를 비롯해 야구명문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선수 수급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해 우리나라에서 개최 예정이던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위해 아마추어팀에 잔류시킨 선수 중 절반이 롯데 연고지 출신 선수들이었다. 당대 한국야구 최고 투수이자, 그야말로 자이언츠였던 최동원과 국가대표 주전 포수 심재원뿐 아니라 야수 유두열이 바로 그들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먹어야 한다. 이들의 공백을 메운 것은 경남고 출신 국가대표 3루수로 활약하던 장신의 안타제조기 김용희였다. 부산상고 출신 강타자 김용철도 4번 타자로서 팀 간판으로 활약했다. 이 밖에도 박용성, 권두조, 이성득, 정학수 등도 나름대로 이름값을 하던 야수였고, 투수진에서는 노상수와 천창호가 최동원을 대신하고 있었다.

1982년 3월 27일 동대문야구장에서 우승 후보였던 삼성라이온즈와 MBC청룡이 한국프로야구의 역사적인 개막전을 치렀다.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을 기록한 이만수의 활약으로 삼성이 앞서 나갔으나 경기는 연장으로 접어들었고, 10회 말 이종도가 끝내기 만루홈런을 때려내 MBC가 대역전극을 펼치면서 개막전부터 흥행에 불이 붙었다.

다음 날인 3월 28일 구덕운동장에서 롯데자이언츠 창단 첫 경기가 열렸다. 상대는 영ㆍ호남 라이벌이자 동시에 제과업계 라이벌이던 해태타이거즈였다. 1만2천명 수용 규모 구덕야구장에 무려 1만6천명의 관중이 입장했으니 그날의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날 경기는 선발투수 노상수가 완투한 결과 14대 2의 대승을 거뒀다. 두 번째 경기인 OB베어스와 경기에서는 선발 천창호의 완봉역투로 4대 0 승리, 세 번째 경기인 삼미슈퍼스타즈와 경기에서 다시 노상수가 선발로 나와 완봉하며 8대 0으로 완승했다. 롯데자이언츠는 개막 이후 치른 3경기에서 매 경기 한 명의 투수만 사용하며 단지 2점을 실점하고 무려 26득점을 올리는 폭발적인 공격력을 자랑하며 단숨에 우승 후보로 거론됐다.

딱 거기까지였다. 이후 롯데자이언츠는 긴 내리막길을 걸어 결국 최종 성적이 꼴찌 삼미슈퍼스타즈 바로 위에 자리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규시즌이 끝나고 열린 올스타전에서 롯데자이언츠 선수들은 펄펄 날았고, 초대 올스타상도 김용희에게 돌아갔다. 당시 부상으로 대우자동차 맵시를 줬는데 “승용차를 받아 횡재한 기분이지만, 운전을 할 줄 몰라 안타깝다”고 멋쩍어하며 맵시 본네트에 걸터앉아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돈 김용희의 소감이 격세지감이다. 이후 롯데자이언츠는 시범경기를 비롯해 봄에는 유난히 강하지만, 최종 성적은 하위권에 머물러 ‘봄데’라는 비아냥을 듣게 됐다. 또한, 시즌 성적과는 달리 롯데자이언츠 선수들이 올스타상을 휩쓰는 것도 전통 아닌 전통이 됐다.

개막전 시구


롯데자이언츠 홈구장인 구덕야구장은 비교적 작은 규모의 구장이어서 부산 사람들의 야구 열기를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만원 관중으로 관중석이 꽉 차게 되면 외야 뒤편에 그라운드를 바라보며 우뚝 서 있던 문화아파트가 또 하나의 외야석이 됐다. 롯데 홈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문화아파트 중간층 이상 복도에는 야구를 보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또한, 구덕야구장 주변으로는 학교들이 밀집해 있어서 홈런이라도 터지면 관중들 함성이 학교 교실에 그대로 전해져 학생들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특히, 당시는 7회부터 공짜로 구덕야구장 입장이 가능해서 돈 없는 학생들이 뒤늦게 야구장에 들어와 응원대열에 합류하기도 했다.

‘부산갈매기’들에게 영원히 기록될 1984년. 최동원을 앞세워 시즌을 뜨겁게 달군 롯데자이언츠는 마침내 1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한국시리즈에도 그 열기를 이어가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치며 끝내 우승을 차지했다. 비록 최종전이 서울에서 열려 감격스러운 우승 순간을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롯데자이언츠 첫 우승과 최동원의 괴력에 가까운 역투를 구덕야구장은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우승 이듬해인 1985년 사직야구장이 개장하면서 롯데자이언츠는 구덕야구장의 영광을 뒤로하고 홈구장을 사직으로 옮겼다. 사직야구장으로 떠난 이후 1992년 우승을 한 차례 더 했지만, 그로부터 30년의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하위권을 맴돌던 롯데자이언츠는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외국인 감독 제리 로이스터가 지휘봉을 잡으면서 ‘노피어(No Fear) 정신’으로 무장하고 2008년, 2009년, 2010년 팀 역사상 처음으로 3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하며 팀의 중흥을 맞이했다. 가을야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만년 하위팀 팬들에게는 가을야구의 기쁨을 안겨준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경사였다. 하지만 로이스터 퇴임 이후 팀이 다시 하락세를 면치 못하면서 팬들 실망감이 깊어졌고, 설상가상 롯데자이언츠가 제2홈구장으로 사용하던 마산야구장을 홈구장으로 하는 창원 연고의 ‘엔씨다이노스’가 2011년 창단되면서 경남지역 팬들이 많이 이탈했다.

지금 가을야구가 한창이다. 물론, 올해 가을야구에도 롯데자이언츠는 초대받지 못했다. 하지만 올해에는 무기력하던 예년의 자이언츠와는 달리 시즌 막판까지도 가을야구 불씨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비록 코로나19 등으로 인해 부산갈매기들 함성이 예전만 못했지만, 팬들도 마지막까지 선수들을 응원하며 힘을 보탰다. 롯데자이언츠는 삼성라이온즈와 더불어 10개 프로구단 중 유이하게 원년 이름을 간직한 전통 있는 구단이다. 무엇보다 열정적인 팬 부산갈매기들이 함께 하는 최고의 인기구단이다. 1992년 롯데자이언츠가 우승한 해에 태어난 부산갈매기들이 올해 서른 살이다. 이제 그들에게 우승의 감격, 아니 가을야구의 기쁨만이라도 안겨줘야 하지 않겠는가. 느그 진짜로 가을야구 안 할끼가? 고마인자 단디 하자!! 내년 가을 사직에 울려 퍼질 부산갈매기를 상상하며….

저작권자 © 양산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