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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삼장수(三將帥) 유감
오피니언

삼장수(三將帥) 유감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2/08/02 10:51 수정 2022.08.02 10:51

전대식
양산시 문화관광해설사
우리 양산시민이라면 하북면 삼수리에 삼장수 생가터가 있고, 그래서 마을 이름이 삼수리(三帥里)이고, 삼장수란 양산 이씨 입향조인 이전생의 세 아들 징석, 징옥, 징규를 가리키고, 그들이 어떤 인물들인지 대강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해서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양산의 소중한 인물자산으로 존경하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기초적인 내용은 생략하고 이 글을 쓴다.

최근에 삼장수와 관련된 의미 있는 반가운 소식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지난 5월, 삼장수 생가터에서 별도 보관 중이던 나무 궤짝에서 양산이씨가첩, 상서문, 호적 관련 문서, 서간문, 고서 등 127점의 미공개 고문헌이 대거 발견된 것이다. 현재 양산시립박물관에서 정리 중인데, 기존 보물 제1001호 ‘양산이씨 종가 고문서’ 16점과 함께 삼장수 가문 단독 특별전도 가능한 정도라고 한다. 아래에 거론하겠지만 삼장수와 관련해 혼란스럽고 미진한 점이 많았던 터라 하루빨리 공개돼 우리 해설사들이 해설할 날이 매우 기다려진다.

또 하나는 지난달 15일 열린 ‘양산 삼장수(三將帥) 가문 재조명을 위한 학술대회’라는 긴 이름의 학술대회다. 2013년 ‘양산의 인물 삼장수’ 학술대회 이후 10여년 만인데, 삼장수는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지고 역사서에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우리 양산의 소중한 인물자산이다. 조선 건국 초기 혼란 속에서 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우리 영토를 확보한 북방의 4군 6진 개척과 남방의 왜구 대책, 그리고 대(對)중국 외교에 이르기까지 삼장수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이징옥의 난’으로 업적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삼장수의 역사적, 인물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이들을 현창하기 위해 우리 시가 추진 중인 삼장수 역사테마공원의 방향성을 살펴본다는 취지의 이번 학술대회는 우리 해설사들이 꼭 들어야 할 내용이라 대부분 참석해 깊이 있는 공부가 됐다. 다만, 양산의 인물과 역사와 유적을 다루면서 9인의 발표자와 토론자 가운데 현직 공무원인 학예사 1인 외에는 양산의 연구자나 시민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은 못내 아쉬운 점이다. 지금까지 학술 발표나 세미나 등이 대부분 그랬다.

반복되는 역사의 패턴 속에서 선현들의 시대와 삶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나아갈 방향과 지혜를 구하는 것을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 행적을 올바르게 추적, 확립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 지면을 통해 삼조의열 중 김원현 양주방어사에 대해서도 이 점을 피력한 적이 있는데, 우리 양산의 상징적 인물인 삼장수도 많은 부분이 부정확하고 혼란스러워서 업적과 위상에 걸맞은 합당한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가장 그럴듯하게 퍼져있는 이야기가 ‘양산 이씨 입향조인 이전생이 1450년(세종 20년) 사망하자 양산부원군에 봉작됐다’든지 ‘이전생이 태종 때 양산부원군에 봉작돼 이것이 양산 지명의 유래가 됐다’는 것이다.(양산시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등) 어떤 자료에는 태종 13년(1413년)이라고 연도까지 명기돼 있다.

그러나 사료에는 장남 징석이 1455년 세조 즉위 직후 논공행상으로 양산군(梁山君)에 봉작됐고, 입향조 이전생은 양산부원군에 봉해진 적이 없다. 또한, 양산이라는 지명은 1413년(태종 13년)에 군ㆍ현의 이름 가운데 주(州)자를 가진 것을, 모두 산(山) 또는 천(川)으로 바꾼다는 기준에 따라 양주(梁州)에서 양산(梁山)으로 정해졌다.(세조실록) 따라서 이러한 정명(定名) 기준과 시기를 볼 때 이전생과 양산의 지명 유래를 엮기는 어렵다.

이하 출전을 일일이 밝히지 않는다. 삼 형제가 모두 무과에 장원급제를(맏형 징석은 두 번) 했다든지, 모두 종1품 위계까지 올랐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징석은 태종 때 현역 관리 승진 시험인 무과 중시에 2등 급제, 같은 해 징옥은 무과 친시에 1등 급제했지만, 징규는 무과방목(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없고 세종 때 36세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음직으로 여겨진다.

가승보(家乘譜)에는 징규가 세종 때 무과에 급제했고, 벼슬은 병조판서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당시 판서(지금의 장관에 해당)는 문관이 임명됐으며, 이징옥의 난과 관련된 정치적 분위기로 볼 때도 가능성이 매우 낮다. 조심스럽게 말하면 과장인 것 같다. 또, 위계는 징석과 징옥은 종1품까지 올랐고, 징규는 종2품까지 올랐다가 마지막에 정4품으로 오히려 떨어진다.

발표문 중 ‘징석은 … 왜구 침입을 격퇴한 데 공로를 세운 점’과 ‘이징석이 경상도에서 처치사로 재임할 당시 왜구의 침략이 … 없었던 사실’이 서로 배치된다. 이 시기 약 10년 동안 왜구는 4차례 침구했는데, 구체적인 침구 지역은 확인 못 했지만 어쨌든 두 문장은 배치된다.

그런데 이런 차이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크게 도움도 되지 않고 의미도 없는 조그만 과장 또는 오류 하나로 인해 삼장수의 다른 업적들도 다 그러려니 하고 부풀린 것으로 치부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심히 우려되는 부분이다. 주제넘은 걱정이라고 나무라지 않으시면 좋겠다. 이러한 혼란은 현창하고자 하는 선현에 대해서도 예가 아니다.

선학들께서 자료 접근이나 조사가 여의찮던 시기에 힘들게 이룩한 활동 성과물 덕택에 이렇게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어서 깊이 감사드린다. 나름대로 공부하고 조사해서 개진하는 나의 견해가 잘못됐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좋다. 오히려 그래서 논의가 촉발돼 하나씩 배우고 가다듬고 바로잡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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