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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64] 한결같은 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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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64] 한결같은 삶이 주는 꽤 괜찮은 위로

홍성현 기자 redcastle@ysnews.co.kr 입력 2023/10/04 14:38 수정 2023.10.04 14:38
귀여운 거 그려서 20년 살아남았습니다/ 정헌재

이기철
시인
‘그거 해서 먹고살겠나?’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거’에 포함된 의미를 잘 안다. 그럴 때일수록 그는 전력투구(全力投球)했다. 삼진아웃은 잡기 어려웠지만, 좌절하지 않고 한 곳만 바라보고 던졌다. 더러 사사구(四死球), 빈볼(bean ball)도 던져봤지만 스트라이크 존에 정확히 넣기는 힘들었다.

종종 마구(魔球)도 ‘마구마구’ 던져봤지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가장 적합한 구질(球質)은 직구였다. 우여곡절(迂餘曲折)이라는 말도 따져보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직진을 위한 몸부림이다. 책 시작이 ‘나는 뭐로 살아남았나?’ 말하는 배경이 있다. 좋아하는 일, 꾸준히 오래 하면, 생기는 일’에 관한 여정(旅程)을 담았다.

정헌재 혹은 페리 테일로 기억하는 작가 책, ‘귀여운 거 그려서 20년 살아남았습니다’는 분명히 개인사이지만, 남 이야기로 들리지 않고 우리가 살아온 길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좌절하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원망해온 시절을 담담히 그려내고, 쓰고, 찍고 노래 부르며 그 순간이 버티는 힘과 자양분이 됐음을 고백하는 자전(自傳)이다.

‘귀여운 거 그려서 20년 살아남았습니다’ 책 표지.

한때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추앙’받았지만 딱 거기까지. 매번 정상에 설 수 없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추락하고 외면받은 시절도 부지기수였다. 그런 때일수록 이모티콘, 앱 개발, 웹툰 등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다 하며 살아냈다.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뜻이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퇴짜’는 ‘백신’이었고, ‘면역’을 생성하게 했다는 점. 물론 온전히 치유하는 데 시간은 더 오래 걸렸지만 말이다.

‘아무도 뽑아 주지 않으면 내가 나를 뽑아 줘야지, 아무도 내게 일을 주지 않으면 내가 일을 만들어야지’하는 결심이 그를 성장하게 했다. 변하지 않은 것 하나. 스스로도 ‘이렇게 오래 살아남을지 몰랐다’는 그것은 다름 아닌 ‘귀여운 거’였다. ‘… 20년’은 계속하면 살아남는다는 점을 깨닫게 했다.

책 내용은 ‘작가라 쓰고 백수로 읽는다’고 하지만 끝이 아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메타포’(은유)다. 결단코 고백에서 멈추지 않는다. 서로 손잡아 주는 일이 얼마나 큰 용기를 불러일으키는지 잠잠하지만 멀리 파문이 퍼져나가듯 그렇게 밀려온다. 파편화된 개인을 경계하되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페이지를 넘길수록 공감 백배다.

벽에 대고 말하는 혼잣말은 기분을 푸는 방법이지만 벽이 어느 날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면 곤란하다. 그는 고난을 풀어내는 방식을 단순하게 고백으로 선택하지 않았다. 지켜주는 이가 있었고 지켜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시킨다’고 하지만 어쩌다 보니 불안과 친해진 작가는 지나온 삶이나 앞으로 통과할 터널 앞에서도 별로 원망하거나 분노하지 않기로 했다니 배울 점이 분명히 있다.

책 속 삽화들.

작가는 오래전부터 이렇게 살고 있다. a.k.a, 즉 예명 ‘페리 테일’이라 불리는 자신은 흰둥이, 바깥양반으로 표현하는 ‘보라 요정’, 반려묘 ‘오랑 씨’와 꽤 괜찮은 삼각형 삶을 꾸려가고 있다. 둥근 원이었으면 너무 빨리 굴러서 튕겨 나갔을 것이고, 사각이었으면 한 바퀴 구르는 것도 힘들어 포기했겠지만 고맙게도 서로 위치가 꼭짓점이어서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튼튼하게 그들만이 가진 속도로 살아간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책 표지에 유난히 오래 머물렀다. 이 한 장면이 모든 걸 설명해주는 단초(端初)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구태여 책 내용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는 이유다. 아픔은 견디는 게 아니라 통과하는 과정이다. 종착역이 죽음이든 부활이든.

작가 말이 오래 남는다. ‘나는 좋아지고 있다. 차곡차곡 1cm씩. 우리는 매일 매일 부서지고 회복된다. 지금까지 높게 날지는 못했지만 오래 행복하게 날고 있다’.

그가 애정한다는 영화, ‘로건’(엑스맨 시리즈 마지막 편)에서 주인공이 남기는 장면을 인상 깊게 설명하고 있다. ‘매일매일 상처가 새로 생깁니다. 살이 접히는 부분은 찢어졌다가 아물고 다시 찢어지는 일이 반복됩니다. 로건의 손에서 살을 헤집고 번득이는 칼날이 나오는 것을 보고 로그가 물어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칼날이 살을 뚫고 나올 때마다 아프냐고. 로건은 ‘항상’이라고 대답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살아남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는 귀여운 거 그려서 20년을 지나고 있고, 나는, 우리는 무엇을 남기며 살고 있는가? 작가가 남긴 마지막 말에서 결국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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