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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봉수의 재발견: 위천 봉수(원적산 봉수대)..
오피니언

봉수의 재발견: 위천 봉수(원적산 봉수대)

홍성현 기자 redcastle@ysnews.co.kr 입력 2023/10/24 09:31 수정 2023.10.24 09:31

전대식
양산시 문화관광해설사
올해 초, 상북면에 있는 원적산 봉수대가 우리 시 7번째 국가 사적(史蹟)으로 지정됐다. 이는 1963년 1월 북정고분군과 법기리 요지 등 6건이 같은 날 사적으로 지정된 후 꼭 60년 만의 일로, 12개 시ㆍ군 14개 봉수 유적이 함께 ‘연속유산’으로 지정된 것이다. 그래서 공식 명칭이 ‘제2로 직봉−양산 위천 봉수 유적’이라는 다소 생소하고 긴 이름인데 하나씩 풀어보자. ‘원적산 봉수대’가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이하 ‘위천 봉수’로 칭한다.

봉수 제도
봉수(烽燧)는 고려ㆍ조선시대에 밤에는 횃불(烽), 낮에는 연기(燧)를 올려 변방 지역에서 발생하는 병란이나 사변을 중앙에 알리던 통신 제도다.

『삼국사기』에는 이미 기원전 9년에 백제 봉현(烽峴)과 기원후 224년에 신라 봉산(烽山), 봉산성(烽山城) 등 봉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지명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삼국유사』에는 48년 김수로왕이 허왕후를 맞이할 때, 망산도 앞바다에 붉은 기가 날리는 허왕후의 배가 나타나자 신하가 섬 위에서 횃불(烽火)로 배를 유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군사제도로서 봉수는 고려 의종 3년(1149년)에 봉화 수, 신호 수단, 근무 조직 등 규정이 있었으나, 무신 정권과 원 간섭기를 거치며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던 것 같다.

국가적 차원의 본격적인 봉수제도는 15세기 전반 조선 세종 때 확립됐다. 봉화 수는 고려시대 4거제(炬制)에서 5거제로 확정됐는데, 이에 따라 평시에는 1거(炬), 적이 국경에 나타나면 2거, 국경에 접근하면 3거, 국경을 침범하면 4거, 우리 군사와 접전하면 5거를 올리도록 했다.

봉수 선로
봉수망은 전국 5로의 간선을 직봉(直烽)이라 하고, 보조선이나 영진(營鎭)ㆍ읍치(邑治)로 가는 지선을 간봉(間烽)이라 했다. 직봉 제1로는 동북 두만강변 우암(경흥), 제2로는 동남 해변 응봉(다대포), 제3로와 제4로는 서북 압록강변 여둔대(강계)와 정주(의주), 제5로는 서남 해변 돌산포(순천)를 기점으로 해서 모두 6~12시간 안에 서울 목멱산(남산)에 도달하게 돼 있었다.

목멱산 5개 봉대는 전국에서 올라온 봉화 정보를 병조(兵曹)에, 병조는 매일 새벽 승정원(承政院)에 보고해 임금에게 알리고, 변란이 있으면 밤중이라도 승정원에 보고했다.

위천 봉수가 속한 ‘제2로 직봉’ 선로에는 간선에 직봉 44개, 10개 지선에 간봉 110개 등 154개 봉수가 있었다. 이 중 14개 직봉이 사적으로 지정된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조선 후기에 5개 직봉 선로와 23개 간봉 선로에 총 622개 봉수를 운영했다.

위천 봉수는 제2로 직봉의 5번째 봉수다. 다대포 ①응봉 봉수에서 첫 봉화를 올리면 ②석성/구봉 봉수→③황령산 봉수→④계명산 봉수를 지나 ⑤위천 봉수가 받고 이어서 울주 ⑥부로산 봉수→⑦소산 봉수를 거쳐 최종적으로 목멱산 제2 봉대로 들어간다.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양산 ‘위천 봉수(원적산 봉수대)’. [양산시민신문 자료]

위천 봉수
상북면 석계리 산20-5 일원, 해발 922m 천성산 북서 자락 325m 낮은 구릉에 위치한 위천 봉수는 남쪽 계명산 봉수와 약 14.8km, 북쪽 부로산 봉수와 약 15.4km 떨어져 있다. 사료에 조선 전기에는 군북산 봉수 또는 원적산 봉수로, 후기에는 위천 봉수로 나온다.

오랫동안 방치됐던 위천 봉수는 1991년 상북의 민간단체 ‘원적산봉수대보존회’ 노력으로 이뤄진 지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1997년에 전국 최초로 복원됐다. 전체 형태는 방호벽이 이중구조인 연곽형으로, 다른 봉수와는 달리 방호벽에 의해 거화 구역과 생활 구역이 분리된 평면을 하고 있다. 사적 지정 당시 우리 위천 봉수가 가장 보존 상태가 양호했다고 하는데, 아쉬운 점은 복원된 다섯 개 연조 간격이 너무 붙어있고 다음 봉수인 부로산 봉수와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별다른 통신 수단이 없던 시절, 봉수는 변방 상황을 최단 시간에 중앙에 전달하는 그 시대 무선통신이었다. 삼국시대 이래 봉수는 파발, 역참 등과 함께 국가 기간 통신망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근대적 통신 방식인 전신과 전화에 밀려 갑오개혁(1894년) 때 이 땅에서 사라졌지만, 오늘날 우리가 자랑하는 세계 최강 통신 강국의 역사적 토양이 됐다.

우리 시에서도 위천 봉수를 재정비하고 봉수 관련 교육, 봉수 거화(炬火) 실연 행사 등 역사 교육과 문화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을 하고 있다니 기대가 크다. 지난 14일에는 지역 문화예술 단체인 양산컬렉투어에서 기획ㆍ주관한 ‘천성산이 품은 문화예술제 각양각색’ 행사가 열렸다. 양산에서 천성산이 가진 상징성과 역사성과 지역성이 어우러지는 국가 사적 ‘제2로 직봉−양산 위천 봉수 유적’이 역사 교육, 문화 관광, 생태 환경 등 지역의 다양한 단체, 다양한 형태의 행사로 과거 봉수의 역할처럼 이음과 소통의 지역 커뮤니티 장으로 다시 활성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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