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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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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기획]첫걸음 내딛는 양산뿌리찾기③사례1-김시민장군 공신교서 반환운동

이현희 기자 newslee@ysnews.co.kr 입력 2007/10/16 00:00 수정 2008.08.19 05:52
시민의 힘으로 찾은 반출 문화재

   
▲ 김시민 장군 공신교서는 최초의 국민모금운동을 통한 유물반환이라는 사례를 남겼다. 진주 시민의 품에 안긴 공신교서는 안착고유제를 가지고 영원한 진주정신을 기리는 표상으로 진주 시민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됐다.(사진 위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열린 김시민 장군 공신교서 안착고유제 장면, 사진 가운데 공신교서가 보관·전시되고 있는 국립진주박물관 전경, 사진 맨 아래 지난해 7월 진주 시내에서 펼쳐진 국민모금운동 모습.)
‘양산 정신은 무엇인가?’

양산이 일본에 반출된 북정고분군 ‘부부총’의 유물을 돌려 받기 위해 추진위를 구성하고 박물관 건립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정작 시민들의 반응은 무심하기 짝이 없다. 공업도시로 이미지가 굳어진 양산에서 역사적 정체성을 외치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자조어린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양산은 충효정신의 상징인 박제상 공의 생가가 있는 지역이고, 신라시대 이후로 물류교통 중심지로 꾸준히 그 위상을 이어내려오고 있다. 없는 것이 아닌 있는 것에 대한 복원은 그래서 더욱 시급한 일이다. 양산이 잠시 머무르다 떠나는 정거장이 아니라 시민들의 애정과 관심 속에서 발전을 거듭하기 위해서는 양산의 정체성을 마련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은 편리한 교통망, 쾌적한 주거환경 이전에 ‘양산다움’을 찾아가는 것으로 바로 박물관 건립 및 유물환수운동이 가야할 길이다.

<기획취재팀> 박성진 편집국장 / park55@, 이현희 취재팀장 / newslee@, 조원정 기자 / vega576@


 

 

 

 

 

일본 고서점 보관, 국민모금운동 통한 첫 반환 사례
보물 제1476호로 지정, 진주국립박물관 보관·전시


“영령이시어! 당신의 공신교서가 왜국에 건너간 후 그동안 얼마나 노심초사하셨습니까? 이 값진 공의 공신교서는 앞으로 공의 숨결의 자취가 서리어 있는 진주성 안의 임진왜란 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이 나라가 존속하는 한 영구히 보존되어 이 곳을 찾는 수만 수억의 사람들에게 이에 얽힌 기막힌 사연과 함께 전시될 것입니다”


지난해 7월 25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일본 땅에서 방황하다 70여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뜻깊은 유물 1점의 안착고유제가 열렸다. 이날 안착고유제에서 축문을 통해 다시 한 번 언급된 이 유물의 ‘기막힌 사연’은 오늘날 우리 문화재 관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김시민 장군 선무공신교서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대첩의 승리를 기념하며 당시 왕이었던 선조가 직접 공을 치하한 문서이다. 하지만 1930년대 일본에 팔렸다가 2005년 10월 일본 동경의 고미술상들의 모임인 동경고전회에서 경매에 출품할 유물 도록이 발간되면서 다시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

김시민 장군 선무공신교서의 경매 사실은 교토대학 김문경 교수와 연구차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학국학중앙연구원 안승준 전문위원에 의해 국내에 알려졌다.

일본에서 진행된 이번 경매는 동경고전회 회원만을 상대로 하는 폐쇄적 형태로 100만엔을 시작으로 경매가 진행되었다. 경매가 시작되기 전만 해도 조선시대 유물인 공신교서는 500만엔 이하로 낙찰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국내 상인들이 경쟁적으로 가격을 올려 1천만엔 이상의 고액으로 일본인 고서적 상인에게 낙찰되고 말았다.

우리끼리 경쟁으로 불필요한 가격 상승을 발생시키는 것은 국제 경매계에서 일반적인 일이라는 점에서 부끄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국민모금운동의 시작
자발적 참여가 빛나다

경매 이후 국립박물관은 공신교서를 다시 사들이기 위해 매입을 시도했지만 회계연도 말이어서 예산 집행과 문화재위원의 감정 절차를 거쳐야 하는 등 행정상의 문제로 난색을 표했다.
특히 통상적으로 비슷한 유물의 거래가격보다 2배 이상 고가의 유물을 매입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입장을 보이며 미온적인 입장이었다.

이런 상황은 2006년 1월 경남신문을 통해 전해지면서 5월말부터 ‘진주문화사랑모임(회장 리영달)’은 유물 환수를 위한 모금운동을 계획하게 된다.

일본 고서적상이 공신교서의 판매가격을 1천500만엔을 제시한 이후 많은 금액을 모금하기 위해 더 효율적인 방안을 고민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을 환수하는데 기여한 MBC ‘느낌표-위대한 유산 74434’가 합류해 전국민 모금 운동으로 전개키로 합의했다.

진주 지역 시민단체와 방송국의 결합을 통해 전개된 국민모금운동은 2006년 독일 월드컵의 열기로 쉽사리 이슈화되지 못하면서 처음부터 난항을 겪었다. 또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ARS 모금이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해 어려운 걸음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방송국의 홍보 덕택으로 전국적인 호응을 얻긴 했지만 실제 관심이 모금으로 이어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일본 고서적상이 제시한 금액이 100만엔 감해진 1천400만엔으로 낮아졌지만 기한인 2006년 7월 24일이 다가올수록 진주문화사랑모임 회원들과 의식있는 진주 시민들의 조바심은 커져갔다.
다행스럽게 7월 20일 목표금액을 모금하는데 성공한 국민모금운동으로 7월 24일 공신교서는 70여년만에 고국을 찾게 되었다. 국내에 돌아온 공신교서는 7월 25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환수고유제를 가지고, 같은 해 9월 22일 국립진주박물관에 안치되어 영원한 휴식을 가지게 된다.

 

   
▲ 70여년 만에 고국의 품에 안긴 김시민 장군 공신교서

정보교류의 전진기지
국립진주박물관

공신교서를 매입하기 위한 국민모금운동에서 진주의 ‘진주문화사랑모임’은 학계, 문화계, 언론계 등을 아우르는 지역 내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다시 한 번 시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그 뒤에 공신교서에 대한 역사적 의미와 현재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국립진주박물관(관장 권상열)이다.

유물환수에 있어 전문가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박물관측은 공신교서에 유출 경위와 문화재청, 각종 단체들의 움직임을 지역 단체에 전달하고 자칫 국립중앙박물관에 귀속될 수 있던 공신교서를 진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물밑 작업을 했다.

시민을 상대로 한 모금운동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각 주체들의 역할을 조율하는 업무를 담당하면서 국립진주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김시민 장군의 후손들이 있는 천안시 등에 공신교서가 가지 않고 진주에 머무를 수 있도록 중재자를 자임해왔다. 

박물관이 숨은 조언자 역할을 수행했다고 밝힌 국립진주박물관 이상훈 학예사는 현재 양산에서 시작하고 있는 유물환수운동에 대해 “우선 유물과 시민들이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며 “양산에 박물관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부산, 김해 등 인근 지역 박물관과 연계해 ‘귀향 특별전’의 형태로 특별전시회를 마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또한 공신교서 반환운동 과정에서 다양한 주체들이 주도권 경쟁을 벌이며 신경전을 펼치는 것에 대해 “딴 목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며 각자의 역할에 대해 명확한 선을 긋는 것이 중요하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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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리영달 진주문화사랑모임 회장
   

“문화는 명사가 아닌 동사”

시민들의 신뢰 얻는 꾸준한 자기희생 필요
유물환수운동을 양산사람 만들기 운동으로

“진주대첩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진주는 진주성이라는 하드웨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소프트웨어가 없었습니다”

진주지역의 풀뿌리 문화운동을 이끌고 있는 진주문화사랑모임 리영달 회장(74)은 이번 김시민 장군 공신교서 반환의 의미를 ‘진주 정신의 복원’이라고 설명한다. 진주성 외에 공신교서에 적힌 내용으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대첩의 상황과 진주 시민들의 나라사랑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리 회장은 인터뷰 내내 ‘진주정신’을 강조했다. 리 회장이 말하는 ‘진주정신’은 진주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논개의 우국충절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문하시랑 하공진, 거란을 물리친 은열공, 강민첨, 남명 조식, 문익점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이 전파한 자유·평등·정의의 정신이다.
리 회장이 이끄는 ‘진주문화사랑모임’은 지난 1995년 지방자치제 시행에 따른 문화자치의 실현을 목표로 결성되었다. 그 이후 일제 시대 지역 유지들의 힘으로 만든 민족학교인 금성초등학교 터를 보존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진주 문화 가꾸기에 나섰다.

진주문화사랑모임이 시민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95년 광복절을 맞아 전개한 망진산 봉수대 복원 운동이다. 이 운동은 일제 시대에 훼손된 봉수대를 복원하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진주 시민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마련되었다. 3달 동안 진행된 복원을 위한 모금운동에서 모두 2천여명의 시민이 참여해 6천500여만원을 모은 망진산 봉수대 복원운동은 진주문화사랑모임이 내세운 ‘문화자치’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 이후에도 진주문화사랑모임은 진주에서 처음 기생과 걸인들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을 기념하여 매년 3.1절에 재연행사를 가지고, 시민문화강좌와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지역문화 활성화를 위해 노력해왔다.

리 회장은 “95년 창립 이후 크고 작은 행사를 통해 시민들의 신뢰를 쌓아온 것이 김시민 장군 공신교서 반환 모금운동을 전개하는데 힘이 되었다”며 “자기희생 없이 시민들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고 양산의 유물환수운동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리 회장은 작은 것부터 실천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며 시민단체 스스로가 역사문화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스스로 자질을 향상시켜야 한다. 시민들과 일심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에 걸맞은 행동과 방향을 보여줘야 한다”

리 회장은 자신의 말처럼 진주문화사랑모임을 통해 2달에 한 번 정도 역사문화와 관련한 시민강좌 또는 세미나를 마련하고 있다. 또한 회원들간 꾸준히 진주 역사에 대해 공부하는 것을 실천해오고 있다.

또한 문화역사가 젊은이들에게 외면 받는 것을 안타까워 하며 리 회장이 직접 진주문화사랑모임 홈페이지(www.jinjuculture.org)를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문화역사가 명사가 아닌 동사라는 자신의 말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셈이다.

리 회장은 박물관 건립과 유물환수운동을 준비하고 있는 양산 사람에게 다시 묻는다.

“양산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리 회장 스스로 문화역사운동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라고 말하듯이 양산의 운동이 자기헌신을 통한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는 운동이 되길 바란다는 말을 끝으로 이번 운동을 통해 공업도시, 개발도시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양산이 문화역사도시로 거듭나 유입된 많은 시민들이 ‘양산사람’이라는 자각을 가지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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