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곡동에 있는 ‘자연처럼 사는 집’을 운영하는 황재수(55) 촌장의 삶에서 자연과 웃음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됐다. 자연 속에서 늘 웃으며 사니 10년 이상 그를 괴롭혔던 암도 이길 수 있게 됐다. 황 촌장은 그가 과거에 경험했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파하는 웃음치료사로 활동하고 있다.
갑작스러운 직장암 3기 판정
절망 같은 고통 속에 살다
1999년, 41세였던 황 촌장은 화장실 가기가 점점 불편해짐을 느꼈다. 변을 봐도 후련하지 않았고 피가 섞여 나오기도 했다. 단순히 치질이라 생각하고 찾은 병원에서 ‘직장암 3기’ 판정을 받았고 ‘수술해도 살아난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암 진단을 받은 후 꼬박 3일을 넋 나간 사람처럼 보냈다. 황 촌장은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병원을 찾아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방사선 치료도 한 달간 받았지만, 치료과정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또 항문 근처에 있는 직장을 잘라냈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변이 나왔고, 신호가 오면 5초 내로 변기에 앉아야만 했다. 게다가 방사선 치료 후유증으로 장 폐쇄와 장 유착이 번갈아서 오게 됐다. 장이 막혀 음식물이 잘 통과되지 않으면 온몸이 마비되기도 했다.
“일반 사람들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고통입니다. 장이 조이고 타는 것 같은 느낌, 잊을만 하면 찾아오는 고통을 느끼면서 방사선 치료가 얼마나 몸에 좋지 않은지 몸소 알 수 있었죠”
우연히 간 암 환자 캠프에서
웃음 찾아 새 마음 얻다
고통스러운 치료과정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힘든 나날을 보내던 황 촌장은 우연히 원동면 내포리 늘밭마을 ‘자연생활의 집’에서 암환자를 대상으로 한 건강캠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울한 마음을 달랠 겸 캠프에 참여한 그는 그곳에서 그동안 잃어버렸던 ‘웃음’을 찾게 됐다.
“암 환자를 위한 캠프라서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환자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는 겁니다. 그게 충격이었죠. 그때 느꼈습니다. ‘아, 이게 끝이 아니구나. 아직 나는 살아있구나’하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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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 백혈구 수치는 6천 이상을 보이는데, 병원에 있을 때 저는 3천에서 3천2백 사이를 오갔습니다. 그런데 웃음치료를 하고 나니 약 없이도 4천까지 올라가게 됐어요”
황 촌장의 건강을 찾는 데는 부인 조경숙(52) 씨의 도움도 컸다. 조 씨는 남편을 위해 ‘자연생활의 집’에서 1년간 화학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자연식을 배웠다. 이후 조 씨는 배웠던 것을 바탕으로 그만의 자연식 요리법을 개발해 자연식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매주 강의를 열고 있다.
투병 중 웃음치료사 과정 수료
암 환자들 위한 활동 펼칠 것
2005년, 그는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준 웃음을 전파하기 위해 웃음치료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황 촌장은 의사들이 외출을 만류할 정도로 심각한 몸 상태였지만, 의지 하나로 아픈 몸을 이끌고 한국웃음연구소를 찾아갔다. 황 촌장은 2박3일간 연구소에서 합숙과정을 거쳐 전문가 과정을 수료했다.
쉽지 않은 합숙과정이었지만 그는 힘들 때마다 더 크게 웃었다. 웃고 또 웃으니 힘든 것도 다 잊게 됐다. 암 환자 최초로 웃음치료사가 된 그는 자신이 겪었던 고통으로 절망에 빠져있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강의와 상담에 나섰다.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알려주고 그들을 위한 심리 상담을 펼쳐 투병생활에 작은 도움이라도 주려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웃음치료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미 미국이나 영국에는 웃음에 대한 프로그램이 많아요. 앞으로 우리나라에도 웃음과 관련된 프로그램이 많이 활성화되면 좋겠습니다”
암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고통이었지만 이 때문에 새로운 마음과 삶을 얻은 그는 많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살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을 찾아주는 사람들이 암을 잘 이겨내고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집사람과 저의 몸만 건강하다면 특히 암 환자들을 위한 활동을 계속 펼쳐나갈 생각입니다. 구체적인 계획을 짜진 않았지만 지금처럼만 해 나가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