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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일과 화환 사업, 탄탄대로 걷다 실패
이후 어르신 일할 수 있는 공장 운영 힘써
1960년대, 가난으로 고등학교 대신 일터로 향해야 했던 아이들. 누구는 섬유공장으로, 누구는 트럭 조수로, 누구는 목수 조수로 나가 ‘기술’을 배웠다. 다행히 고등학교에 진학해 ‘공구’대신 ‘책’을 잡았던 권문혁(75, 원동면 화제리) 씨는 공부를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부산동아고등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지만 입학금이 없어 등록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학교에 가고 싶어 거리에서 ‘아이스께끼’ 장사를 하고, 신문을 돌렸다. 이후 부산동성고에 입학할 기회가 생겼고, 그동안 벌어놓은 돈을 털어 학교에 갔다. 하지만 다음이 문제였다. 같이 진학한 친구들 중 몇몇은 이미 돈이 없어 학교를 그만 둔 상태였다. “공부 말고 공장을 다니자” 스스로 결정을 내렸지만 더 배울 수 없는 안타까움은 지울 수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놈에 돈’을 벌기 위해 권 씨는 기계조립 공장에 취직했다.
공부 잘하던 18세 소년
고학생에서 공장 관리자로
“그 시절엔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저도 그 중에 한 명이었지요.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별 수 없었어요. 왜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을까라는 원망도 해봤지만, 저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일을 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공장에서 권 씨는 ‘일 잘하는 청년’으로 유명했다. 말단 직원이었음에도 공장 사장에게 운영시스템이 문제가 있으니 다른 방법으로 운영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사장은 권 씨의 말을 귀담아 들어줬고, 일 한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공장의 관리자가 됐다. 그때 그의 나이 18세였다. 권 씨가 관리자가 되는 바람에 해고되는 사람도 있었다. 자신보다 어린 관리자를 인정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권 씨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고 일에 집중했다. 그리고 공장은 날이 갈수록 번창했다.
잘 돌아가던 공장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곧 망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공장에서 사장도 만나기 힘들어졌다. 사람들은 하나 둘씩 공장을 떠났고, 그들의 말처럼 공장은 곧 망했다. 하지만 권 씨는 이것을 기회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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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잃고 일터 잃고 ‘절망’
1989년, 권 씨는 공장에서 나와 서울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바로 ‘화환’ 사업이었다. 말 그대로 ‘대박’이 터졌다. 한 달에 천만원을 벌 때도 있었다. 당시 물가를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권 씨는 이 기세를 몰아 부산에서 전자제품 판매업을 시작했다. 두 사업 모두 1년간 탄탄대로였다.
“아마 내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화환 사업을 했을 겁니다. 1년 동안 서울과 부산을 얼마나 오갔는지 모릅니다. 하루에 두 시간 자며 일을 했는데, 얼마 못자도 힘들지 않았어요. 바쁘게 일하며 ‘아, 이때까지 고생했던 것, 이렇게 보상받는구나’하고 생각했죠”
권 씨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권 씨 밑에서 일하며 화환사업의 노하우를 알게 된 직원들이 회사를 나가 별도 사업체를 개업했다. 그들은 권 씨보다 더 좋은 서비스와 싼 가격으로 그를 위협했고, 순탄했던 사업은 1년 만에 적자를 보기 시작했다. 화환 사업에만 신경 쓴 탓에 전자제품 사업도 덩달아 망해버렸다.
부산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당시만 해도 시골 외진 곳이었던 원동면 화제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권 씨는 후회와 자책감 속에 수년간 술독에 빠져 지냈다. 그런 그를 잡아준 것이 아내 하징자(72) 씨였다. “다시 살아봅시다” 간절한 아내의 말에 권 씨는 다시 일어서리라 다짐했다.
↑↑ 권 씨 부부가 휴식 시간에 일성사 직원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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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보다는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소중
그러던 중 대성산업(상북면)에서 콘센트 부품 조립일을 따냈다. 1995년의 일이다. 간판도 없는 컨테이너 박스에서 시작한 일은 이들에겐 희망, 그 자체였다.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에 ‘일성사’란 상호도 만들고 사업자등록도 했다. 어릴 적 권 씨를 힘들게 했던 공장으로 돌아왔지만 오히려 편해졌다.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기회였기 때문이다.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내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이죠. 평생 고생 안 시키고 행복하게 해 준다 약속하고 데려왔는데 늙어서까지 고생만 시켜서….”
그러나 아내는 그런 권 씨를 원망하지 않았다. 사업이 망한 것도, 형편이 기운 것도 그의 탓이 아니라며 위로했다. 담담히 현실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새벽 6시에 시작되는 부부의 일과는 오후 7시 30분이 돼서야 끝이 난다. 많이 일하면 많이 벌수 있는 일이었기에 그들은 하루를 48시간처럼 살았다. 일은 밀물처럼 들어왔지만 두 사람의 인력으론 역부족이었다. 채용공고를 내도 젊은 사람들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그들은 주어진 일에 만족하고 오래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 어르신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오히려 젊은 사람보다 어르신이 더 적극적으로 일을 해요. 젊은 사람은 하찮은 일이라며 피하기 바쁘고…. 지금도 82세인 어르신이 일하고 있죠. 우리 중에 가장 나이가 많으시지만 얼마나 잘 하신다고요”
일성사를 거쳐 간 어르신만 해도 100여명. 60대부터 80대까지, 나이만 들으면 일하기 어려울 것 같은 어르신도 묵묵히 일을 해냈다. 나이가 있어 손이 느리지만 빨리 하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일한만큼 가져간다’는 것이 일성사의 방침이기 때문이다. 출근시간도, 퇴근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다. 사장이라고 많이 받아가는 것도 없다. 권 씨 부부 역시 그들이 하는 만큼 월급을 가져간다. 이런 운영방침이 많은 돈을 버는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권 씨 부부는 ‘돈을 버는 것’보다 ‘일을 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기에 돈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 모두 돈보다는 이렇게 나와서 운동처럼 일 하는 것,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 그게 좋아서 일하러 옵니다. 우리도 어르신이 나와서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고요”
좌절, 희망 겪으며 살아온 인생
마지막까지 ‘봉사’하며 살고 싶어
일성사와 함께한 지 18년, 나이가 들어가면서 힘에 부치지만 일하기 싫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허리도 아프고, 무릎이 쑤시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배가 고프면 아침밥을 차려 먹듯 출근하는 것은 이제 당연해졌다. 그래도 나이가 나이인 만큼 은퇴 생각도 하고 있다. 누군가 일성사만 맡아준다면 이제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작은 봉사’라도 하고 싶다는 게 이들의 소망이다.
“누군가 이곳을 그대로 이어받아준다면 내 그대로 주고 은퇴할 생각도 있죠. 다만 지금처럼 어르신들이 함께 일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요즘 어르신이 일할 곳이 많다지만 이곳처럼 자유롭고 편한 곳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든이 되기 전에 인수인계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에요. 그럼 저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공원이나 길거리에서 그동안 하고 싶었던 환경미화 봉사를 할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