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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송 스님 시인 통도사 자장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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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산에 사느냐?” 어떤 사람이 육조 혜능에게 물었다.
“동량이 되기 위해” 혜능이 거침없이 말했다.
산은 나무만이 아닌 사람과 자연의 정신 그리고 몸을 길러내는 수련장이다. 심심산골에는 물과 바람이 살고 있어 깊은 산이다. 물과 바람은 풍수(風水)를 이뤄 명산(名山)이 된다. 명산은 높고 낮은 것을 떠나 고을과 천지의 대자연과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러한 터에 큰 인물이 아니 날 리 없다.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은 1544년(갑진년, 甲辰年) 10월 17일 밀양 무안면 고라리에서 태어났다. 유정은 조선 중기 이름난 스님이다. 본관은 풍천(豊川, 황해도 송화), 속명은 임응규, 호 송운(松雲), 법명은 유정, 아버지는 임수성이다. 13세에 황악산 직지사(直指寺) 신묵화상(信默和尙)에게 출가해 팔공산, 금강산, 청량산, 태백산 등지에서 수행했다.
1586년 옥천산(沃川山) 상동암(上東庵)에서 한 줄금 비에 무참히 꽃잎이 지는 모양을 보고 무상(無常)함을 느껴 따르던 문도를 모두 해산하고 오롯이 선에 몰두해 깨달음을 얻었다. 묘향산 청허당(淸虛堂) 휴정(休靜)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왜란이 발발하자 의연히 떨쳐 승군을 모아 승병장(僧兵將)이 됐다. 이는 스승 휴정의 간곡한 격문 서신을 받고난 후다.
전라도 처영, 뇌묵, 희묵대사와 충청도 기허당(騎虛堂) 영규대사는 유명한 승병장이다. 유정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빛나는 공훈을 세웠는데 특히 평양성 전투와 의령에서 도원수 권율장군과 합세해 왜군을 물리친 일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당시 그가 수축(修築)한 산성은 팔공산성, 금오산성, 용기산성, 악견산성, 부산성, 남한산성 등이다.
적장 가토 기요마사와의 문답은 그의 뛰어난 재치와 용력(勇力)을 가늠케 한다.
“조선의 보배는 무엇이오?”
“우리나라의 보배는 바로 당신의 목이오!” 간담을 서늘케 하는 답변이다.
1604년 일본에 건너가 실권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講和)를 맺고 귀국길에 조선의 백성 3천500명을 이끌고 돌아왔다. 1610년 8월 26일 해인사에서 대중을 모아 설법하고 결가부좌(結跏趺坐) 한 채 입적했다. 조정에서는 밀양 표충사(表忠祠)와 묘향산 수충사(酬忠祠) 두 곳에 사당을 지어 그의 높은 덕을 기렸다. 시호(諡號)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저서로는 사명당대사집(泗溟堂大師集) 7권과 분충서난록(奮忠紓難綠) 1권이 있다. 해인사 홍제암에 그의 부도와 석장비(石藏碑)가 있다. 해인사의 홍제존자비는 근 200년만의 고승비문이니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승과(僧科)에 급제한 유정은 당시의 유학자 박순, 임제 등과 깊이 사귀었다.
임제는 서정과 재치가 뛰어난 문인으로 황진이와의 일화가 유명하다. 그의 문집 백호집(白湖集)에는 700여수의 한시가 수록돼 있다. 전국을 방랑하며 노래한 그의 성정과 기재를 율곡 이이, 허균, 양사언 등은 특별하게 여겼다.
다음은 유정이 조선국 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보낸 시다.
남녘 지키는 절도대장군
征南節度大將軍(정남절도대장군)
거친 왜적 위태로운 바다
고요히 다스리네
威振蠻荒靜海氣(위진만황정해기)
때는 9월 9일 중양절 생신이라
節入生辰重九日(절입생신중구일)
달 밝은 밤 호가소리 진중 흔드네
月明歌吹動轅門(월명가취동원문)
이순신장군께
奉李水使(봉이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