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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산과 사람이 좋으니 극한도 이겨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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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사람이 좋으니 극한도 이겨내죠”

김민희 기자 minheek@ysnews.co.kr 입력 2014/08/19 11:04 수정 2014.08.19 11:03
히말라야 가셔브룸 2봉 등정

산악인 ‘김성상 씨’




우연히 맺은 산과의 인연은 그를 히말라야의 신비로운 설산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이번엔 정상에 오를 수 있을까?’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꿈은 이뤄졌다. 지난달 24일, 히말라야 14좌(히말라야 산맥의 8천m 이상 14개 고봉) 중 가셔브룸 2봉(8천35m)에 오른 김성상(55) 씨의 이야기다.


2년간 준비해 6월 파키스탄으로 출국
두 번 시도 끝에 7월 24일 정상 밟아

히말라야에는 8천m급 봉우리가 14개 있다. 이를 히말라야 14좌라 한다. 김 씨는 이들 중 8천68m인 가셔브룸 1봉과 8천35m 가셔브룸 2봉을 오르기 위해 대원들과 지난 6월 11일 파키스탄으로 떠났다.

2년간 매주 대원들과 만나 산행을 하고 체력도 기르며 고대한 등정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떠났지만 산은 그에게 쉽게 정상을 내주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눈보라와 한 발짝 떼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바람. 결국 김 씨는 1봉은 포기한 채 2봉만 오르기로 결정했다.

2봉도 쉽지는 않았다. 7월 17일, 김 씨는 정상에 오르기 위해 대원들과 길을 나섰다. 하지만 기상 악화로 인해 얼마 가지 못하고 베이스캠프로 돌아와야 했다.

“‘다음날이면 갈 수 있겠지’ 생각하면서 날씨가 나아지길 기다렸어요. 바람과 눈보라가 조금이라도 잦아지면 떠나기 위해서요. 이미 1봉도 포기했는데 2봉마저 포기하면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없잖아요. ‘정상을 밟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1주일을 기다렸죠”

7월 23일, 김 씨는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바람과 눈이 잦아든 것이다. 김 씨와 대원들은 정상을 향해 걸었다. 23일 밤에 출발한 이들은 어둠의 공포에 맞서며 정상으로 향했다. 날이 밝고 정상이 이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다 왔구나!’ 싶었지만 예상치 못한 마지막 고비가 있었다. 눈보라였다.

“정상 바로 밑에 있는 큰 바위에서 1시간 반을 기다렸죠. 강행군에 몸이 지치고 마음도 지쳤지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어요. 정상이 눈앞에 있기에…”

기다림 끝에 이들은 정상을 밟을 수 있었다. 여전히 거센 바람이 김 씨와 대원들을 위협하고 있었지만 다치는 이 없이 무사히 일정을 끝낼 수 있었다.


93년 등산학교로 산타기 시작
20년간 산행에도 정상 운 없어

산과의 인연은 우연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등산학교에 입학하며 산의 아름다움과 등산의 즐거움을 알게 됐다.

“93년 등산학교 입학할 때만 해도 그냥 동네산 타고, 국내에 있는 산 이곳저곳을  다니고 그랬죠. 히말라야와 인연을 맺은 건 1999년이에요. 그것도 우연이었죠. 제게 함께 가자고 제의한 사람 덕분이니까. 그렇게 히말라야를 처음 만나고 짧으면 1년, 길면 2년에 한 번은 꼭 도전했어요”

하지만 김 씨는 유난히 정상 운이 없었다. 산행 대장으로 나서기보다 부대장으로 있으면서 다른 대원들의 등반을 돕는 역할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등반 순서가 뒤로 미뤄지며 어떤 때는 날씨로 인해, 어떤 때는 장비로 인해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하는 상황이 계속 됐다.

“2007년 에베레스트를 오를 때는 저희 팀 말고 다른 팀도 같이 올랐어요. 근데 앞선 팀이 정상에 오르고 하산하다가 사고를 당했어요. 그때 11명 정도가 죽었죠. 그 상황에 저희가 정상에 오를 수 있나요. 그리고 이듬해 K2에 올랐을 때도 앞서 등반하던 팀에서 사고가 났어요”

김 씨에게 유난히 어려웠던 ‘정상 정복’이었지만, 이번에는 꼭 해낸다는 일념으로 산을 올랐다. 그래서 김 씨는 이번 등정이 더 값지다고 말했다.


죽음에 고통 넘기면서 산 타는 이유
“산과 함께하는 사람이 좋기 때문”

8천m 이상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극한의 환경이다. 보통 해발 3천500m가 넘으면 두통과 구토ㆍ식욕 감퇴 등 고소증세가 나타나고, 6천m 이상에서 장기간 노출되면 뇌가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 산소 부족과 저기압 상황에서 뇌가 붓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산을 몇 번이고 올랐다. 그렇게 험난하고 위험한데도 왜 산에 오르냐는 질문에 김 씨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사람 때문이죠. 산도 산이지만, 산에 오르기 위해 준비하는 그 시간이 정말 소중하거든요. 매주 주말마다 대원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함께하는 시간이 좋아요. 산에 오르는 게 좋기보다 산을 오르기 위해 같이 고생한 사람들과 함께해서 좋은 거죠”

산은 그저 친목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며  김 씨는 유쾌하게 웃었다.

“보통 산악인들은 ‘산’에 큰 의미를 두거든. 근데 전 산보다 사람이 더 좋아요”


걱정하는 가족에게 미안하지만
앞으로도 등반은 계속 할 것

한참 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렇다면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 궁금해졌다. 김 씨는 직장에 다니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양산대학교(현 동원과학기술대) 건축과를 나온 김 씨는 산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회사에 다니며 일을 했다. 하지만 산에 오르며 일을 그만두게 됐다. 한 번 등반하는데 2~3개월이 걸리다 보니 회사를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리랜서처럼 제게 인테리어나 건축을 의뢰하면 그 일을 해주는 식으로 돈을 벌고 있죠. 갑자기 산 타러 훌쩍 가고 그러니까 정기적인 일을 할 수가 없죠”

그런 속에서도 산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았다. 이제 제발 그만 가라는 가족의 만류에도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야’라는 거짓말을 하며 산으로 향했다. 김 씨는 걱정하는 가족의 마음을 잘 알지만 그래도 산이 운명인지라 어쩔 수 없다며 미안함을 표했다.

“가족에겐 미안하지만 앞으로도 산을 탈 계획이에요. 7천m든 8천m든 오를 수 있는 산은 다 올라가 보고 싶거든요. 아직 한국에 돌아온 지 며칠 안 돼서 지금은 좀 쉬고 다시 훈련을 시작해야죠. 2년 후 또 새로운 산에 오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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