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양산시민신문

1개월 시한부 엄마, ‘효심’으로 돌봐 살린 딸 ..
사람

1개월 시한부 엄마, ‘효심’으로 돌봐 살린 딸

김민희 기자 minheek@ysnews.co.kr 입력 2015/04/14 10:15 수정 2015.04.14 10:12
폐암 말기 판정받은 노모 돌보는 유진숙 씨

“엄마와 약속 지키기 위해 당연한 일 했을 뿐”




병 없이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무병장수한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많다. 어쩌면 병은 우리 삶의 일부다. 그럼에도 우리는 병을 나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갑자기 나에게, 혹은 가족에게 병, 특히 난치병이 찾아오면 환자와 가족은 질병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 만만찮은 의료비용, 질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라는 삼중고를 겪으며 살게 된다.

난치병이라고 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온전한 삶을 포기하거나 아예 삶을 끝내라고 다그치는 극한 상황에서 ‘삼중고’를 이겨낸 이들은 TV와 신문 등 각종 매체에 다뤄지며 지금도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환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준다.



난치병을 극복한 기적 같은 이야기가 우리 주변에도 있다. 폐암 말기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돌봐 8개월 만에 초기 상태로까지 되돌린 유진숙(51, 신기동) 씨가 그 주인공이다.



“어머니는 1999년 뇌졸중으로 한 번 쓰러지셔서 몸의 반만 쓸 수 있는 상태셨어요. 지난해 추석 쯤, 건강검진 차 간 병원에서 갑자기 어머니가 쓰러지는 바람에 종합검진을 받았고 그때 비소세포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80대인 유 씨 어머니인 천경순 씨에겐 방사선치료도, 수술도 다 꿈같은 이야기였다. 폐에서 어깨, 뇌 등 온 몸에 전이된 암세포 때문에 어떻게 손도 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의사는 유 씨에게 ‘한 달도 남지 않았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답이 없는 상황에 주변에서는 ‘시설 잘 돼 있는 요양병원에 보내라’고 이야기했으나 그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어머니와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뜬금없이 어머니가 제게 그런 말을 했어요. 혹여나 내가 불치병에 걸리더라도 너희들 손에서 마지막까지 있고 싶다고요. 오래 전 이야기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그 말이 딱 떠올랐어요. 그래서 직장도 바로 그만두고 막내 여동생과 둘이서 어머니를 돌보기로 했죠”

그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0.1%의 가능성에 도전했다. 의사가 정 치료를 원한다면 항암제 ‘타세바’를 투여해 보겠냐는 것이었다. 유 씨 어머니가 항암제를 버틸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지만, 성공확률 50대 50이라는 말에 망설일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으면 돈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어머니를 위해 뭐든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투여 전 엄마 암세포에 약 성분을 넣어보니 약이 이겼다고 하더라고요. 그것만으로도 고마웠어요. 가능성이 생긴 거니까요. 거기에 어머니가 살고자하는 의지가 강해 의사들도 걱정하지 말라며 독려해주셨죠”
↑↑ 8개월 전 폐암 선고를 받고 병원에서 치료받는 천경순 씨 모습


어머니 위해 집도 리모델링
“엄마를 위해라면 뭐든 한다”


유 씨는 치료를 받으면서도 어머니가 내내 병원에 있는 것이 더 건강에 안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엔 온통 환자들이고 앓는 소리 등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란 판단에서다. 그의 어머니도 기계에 얽매여있는 병원보다 집에 가길 원했다. 그래서 어렵지만 병원 근처인 막내 동생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우선 엄마 몸에 있는 기계들을 떼어내야 했어요. 음식물을 섭취하는 코 줄과 호흡을 돕고 가래를 뱉는 목 줄 등 하나씩 다 떼야 했죠. 거기에도 두 세달 가량 시간이 걸렸어요. 암에 호흡기질환까지 있어 자가 호흡이 쉽진 않았는데 우리 정성이 엄마에게도 닿았는지, 그 힘든 시간을 이겨내더라고요”

유 씨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는 동안, 유 씨와 동생도 어머니를 위한 집을 준비하고 있었다. 침대도 환자가 쓰는 전용으로 바꿨고 욕실도 다 뜯어내고 최대한 직접 움직여 갈 수 있는 동선으로, 또 어머니가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맞춤으로 준비했다.

“시간이며 돈이며 만만치 않게 들죠. 그래도 엄마만 생각했어요. 내 엄마고, 날 이만큼 키워주신 분인데 내가 이 정도도 못하냐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도 제 욕심만으로는 이렇게까지 할 수 없었을 텐데 가족들이 다 이해해준 덕분에 딸 노릇 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고 걷고 활동하고… 기적의 8개월
암세포 사라지고 초기 수준으로 회복


겨우 몸의 기계를 떼어내고 집으로 향했지만, 유 씨의 어머니는 10m도 한 번에 걷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헛구역질을 하는 등 고통에 시달렸다. 그래도 그의 어머니는 ‘아프다’는 말 대신 딸의 손을 잡고 걷기를 원했다. 그렇게 한 걸음씩 움직이며 유 씨와 어머니는 매주 통원치료를 하게 됐다.

집에서 유 씨와 그의 동생은 어머니의 손발이 됐다. 유 씨는 어머니의 운동과 대소변, 목욕 등 생활에 대한 것을 담당했고 동생은 음식을 전문적으로 공부해 식단을 짰다.

“24시간 곁에 있으면서 온몸을 주무르고 욕창이 생기지 않게 몸을 닦아야 했어요. 환자에게 나는 그 냄새가 엄마에게 나는 게 싫어서 매일같이 목욕을 시켰죠. 덕분에 엄마 곁에 가면 늘 향긋한 냄새가 났고 엄마도 그걸 좋아했어요. 저는 몸으로 엄마와 함께 했지만, 제 동생은 공부까지 하면서 더 노력했죠. 식단 짜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이거든요. 어떤 음식이 어떻게 몸에 좋은지 알아야하고 조리법을 비롯해 간까지 신경 쓸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요. 그래서 정말 동생에게 고마워요”

두 자매가 힘을 합친 탓일까. 어머니 병세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한 번에 13알이나 먹어야 했던 약이 8개월 만에 2알로 줄었다. 먹어야 하는 약이 준만큼, 몸속 암세포도 싹 사라졌다. 온몸을 다 뒤져도 폐와 뇌에 콩알만한 암세포가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도 기적이래요. 8개월 만에 말기 암 환자가 이렇게까지 회복하기는 힘들다고요. 엄마도 예전보다 많이 걸을 수 있고 음식도 잘 드세요. 물론 말도 하시고요. 짧은 말이지만 고맙다고 이야기도 하고 웃어주기도 하세요. 눈물과 고통으로 보낸 시간이 아깝지 않은 결과죠”

↑↑ 천 씨가 회복해 집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모습


말기 암 이겨낸 비법
많은 사람에게 공유하고파


주변의 많은 사람 덕분에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는 유 씨는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암 치유를 위해 고통 받고 있는 환자와 가족에게 자신이 했던 방법과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은 것이다.

“암 치료와 관련한 인터넷 카페가 많더라고요. 저도 그런 곳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이번엔 제가 도움을 줄 차례인 것 같아요. 아직 완치된 것은 아니지만 병세가 이만큼 좋아지셨고, 또 암 진단 때부터 지금까지 매일같이 일기를 썼거든요. 엄마에게 어떤 증세가 있었고 어떤 치료를 했으며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그날의 세세한 이야기를 다 공유하며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분들이 많았으면 해요”

1개월 시한부 선고를 극복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헌신한 유 씨. 그는 “불가능은 없다는 의지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며 “남은 날도 엄마와 계속 행복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고 앞으로는 주변 어르신을 위해 봉사활동도 꼭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양산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