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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30년 모은 월급봉투에 담긴 ‘그때 그 시절’..
사회

30년 모은 월급봉투에 담긴 ‘그때 그 시절’

김민희 기자 minheek@ysnews.co.kr 입력 2015/06/02 09:04 수정 2015.06.02 09:00
1964년부터 1994년까지 남편 월급봉투 모은 박광자 씨




“남편 열정 담긴 소중한 봉투라 차마 버릴 수 없었어요”

전자금융이 활성화하고 돈 거래 대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산으로 처리되는 지금, 현금이 담긴 노란 월급봉투 이야기는 까마득한 옛 시절 추억으로 남겨졌다. 하지만 1964년부터 1994년, 30년이란 세월 동안 남편의 월급봉투를 차곡차곡 모은 사람이 있어 화제다. 바로 물금읍에 사는 박광자(71) 씨가 그 주인공.

“결혼하고 나서 남편 짐 가방을 정리하는 데 얼마 없는 짐 사이에 꼬깃꼬깃한 월급봉투 두세 장이 들어있는 거 아니겠어요. 남편이 열심히 일해 받은 땀의 증거인데, 함부로 버릴 수 없어 모아뒀죠. 그게 이렇게 많아질 거라곤 생각도 못 했죠”

박 씨 남편은 부산에서 한평생을 경찰관으로 근무했다. 박 씨와 결혼하기 전부터 경찰관이었던 남편은 정년퇴직 때 대통령 훈장을 받을 만큼 자기 일에 최선을 다했고, 그만큼 자부심과 열정도 있던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모은 건 아니었어요. ‘버리기 아까워서’가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겠네요. 남편이 경찰이었지만 월급은 정말 적었기에, 집에 들어오는 물건 하나하나가 소중했거든요”

월급 6천원에서 200만원까지
30년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박 씨는 지금 경찰 월급이 얼만지는 몰라도 그때는 말 그대로 ‘짠’ 월급이었다며 액자 속에 보관한 월급봉투를 들여다봤다. 그를 따라 봉투를 살펴보니, 5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잘 보관된 덕분에 봉투에 적혀있는 월급 금액을 볼 수 있었다.

1964년에 3천280원, 1965년 4천629원, 1966년 6천172원…. 천원 대를 밑돌던 월급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높아졌고, 1970년이 돼서야 1만원이 넘었다. 1980년대는 33만원이, 가장 마지막인 1994년 1월 급여명세서엔 200만원이 조금 넘는 금액이 적혀있었다.

“1980년쯤 지나서야 그나마 살만해졌다고 할 수 있죠. 처음에 6천원으로 살림을 꾸리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바깥양반이 경찰이다 보니 그래도 집에서 신문을 봤는데, 한 번 읽은 신문을 폐지로 바로 파는 것이 아까워서 쌀 담는 봉투로 쓴 뒤에 팔기도 했죠. 요즘 사람이라면 신문으로 무슨 봉투를 만들어 쓰냐고 할 거예요. 연탄 쓸 때도 타고 남은 검은 부분이 그렇게 아까웠어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써볼 거라고 밑에부터 새하얗게 변한 연탄을 자기 전에 거꾸로 뒤집어 넣었어요. 그럼 그날 밤까지는 어떻게든 가거든요. 참 어렵게 살았죠”

박 씨는 월급봉투를 천천히 보며 “처음에는 손으로 적혀 나오던 게 1990년대가 되니 기계에 찍혀서 나왔고, 남편이 퇴직했던 1995년, 한 해는 월급봉투가 아닌, 이체를 통해 바로 받았어요”라고 덧붙였다.

힘들어도 행복했던 그때
생각나게 하는 옛 물건들


박 씨는 박봉임에도 새벽이든, 밤늦게든 경찰 소임을 다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던 남편을 생각하며 힘들었던 시절을 버텼다고 말했다. 새벽 5시, 해도 뜨지 않은 시간에 근무를 나가기 위해 뒤척이던 남편 발에 양말을 신겨주고 배웅하던 어려웠던 시절이 없었으면 지금처럼 편안하게 노년을 보낼 수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남편이 든든하게 있어줬기에 힘든 시간도 좋은 추억으로 남았죠. 그래서 3년 전쯤, 갑자기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더 힘들었어요. 혼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죠. 집 밖에도 못 나가겠고 모든 게 두려웠어요. 그래서 사실 월급봉투 이야기도 남편이 없는데 해도 될까 많이 고민했어요”

혼자 남겨진 시간 동안, 박 씨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뭐든 다 했다며 그때를 설명했다. 집에만 있다간 정말 우울증이라도 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변에서도 제발 밖에 나가라고 성화였어요. 그래서 아는 분들 따라 이런저런 모임에도 나가고, 봉사활동도 하게 됐죠. 통도사 자비원 어르신을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쪽으로 관심이 가더라고요. 공부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래서 박 씨는 늦은 나이지만 ‘대학’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대학 준비를 하기 전 취득했던 한자 1급 자격증 덕에 그는 2013년 부산경상대학 사회교육과 늦깎이 신입생, 그것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늦깎이 학생이 몇 안 돼서 학교에 적응을 잘할 수 있을까 걱정도 많았죠. 근데 다행히 어린 친구들이 잘 따라줬어요. 그 마음도 고마웠고, 또 할머니라고 무시할까 싶어 과제며 시험이며 더 열심히 준비했죠. 지난해에는 어린이집 실습도 나갔고 졸업 작품 전시회 때 제가 만든 수업도구가 과를 대표해 전시되기도 했죠”

박 씨가 공부했던 책과 공책, 과제물, 수업도구 등도 월급봉투가 있는 방 한편에 고스란히 모여 있었다.

“이런 책도 제겐 정말 소중한 거라, 다 쓰고도 모아뒀어요. 가끔 이것들을 다시 보면서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간을 떠올리는 거죠. 말하고 보니 나이 먹은 사람이 너무 사소한 거로 자랑하는 거 아닌가 싶네요. 당연하게 모아둔 건데, 이게 이야깃거리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말과 기억은 세월이 지나면 잊히거나 변형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박 씨가 모아놓은 것은 변함이 없다. 한 월급쟁이의 봉투, 한 가정주부의 책과 공책 등이 뭐 큰 의미가 있느냐고 말했지만, 봉투 속 30년 흔적에는 지난 시절의 숨결과 자취가, 책과 공책에는 나이를 잊은 도전과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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